책
무진기행 ㅡ 김승옥
파랑잉크
2020. 5. 9. 18:44
필사도 해 보았다. 작가의 섬세한 감각과 사고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마음에 들었던 장면들)
기차역에서 본 미친여자의 모습에서 청년 때 골방에서 보낸 자신의 삶을 떠올리는 장면.
하선생과 늦은밤 걸어오며 밤하늘을 별들을 보며 개구리 울음소리를 생각하는 장면.
바닷가에서 1년간 머물때 쓸쓸하다는 말이 가득한 편지를 썼던 것을 떠올리는 장면.
서울에서 아내가 보낸 전보가 무진에서의 내 행동과 사고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장면.
아쉬운 점)
문장이 좀 긴 것과 반복된 어구들.
p12 ㅡ복선처럼 깔아둔 문장.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
p17
그들은 이제 점점 수군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감도 모른다는 듯이 그들은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p24
타인은 모두 속물이라고
p29
모든 사물들이 모든 사고가 그 사이렌에 흡수되어 갔다.
p33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 ㅡ 잘 아는 체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41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바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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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중(나)은 인숙에게 주려고 썼던 편지를 찢었다. 어떤 말도 인숙에게 남기지 않고 무진을 떠나버린다. 아내가 전보를 보내지 않았다면 윤희중과 인숙은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듯하다. 윤희중은 인숙에게서 외로움의 냄새를 맡았고,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뿐이다. 무진을 벗어나면 서로가 잊힐 사람일 뿐이라는 건 윤희중도 인숙이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무진에서 느껴지는 쓸쓸한 감정을 빌미로, 혹은 현실을 떠나왔다는 감성에 젖어 쉽게 사랑이라 믿어 버린 것은 아닐까.
+
윤희중은 무진(혹은 시대적 상황이나 일들)에서 느끼는 독특한 무드가 자신을 끌고 간 것이지, 자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며 무마하려 한다. 그래도 마지막 문장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걸 보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속물임을 깨달아버린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