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ㅡ 손원평

파랑잉크 2020. 5. 20. 11:50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이란 장애를 가진 아이(윤재)가 성장하며 겪는 이야기다. 선천적으로 아이는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가 작아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기본적인 감정을 문자화하여 행동 메뉴얼을 교육시킨다. 주입식 감정교육이랄까. 아이는 할머니와 엄마의 보호 아래 큰 문제없이 메뉴얼대로 적응해간다. 아이의 16번째 생일 날, 아이 눈앞에서 엄마와 할머니가 '묻지마 살인자'의 표적이 된다. 할머니는 죽고, 엄마는 뇌사상태로 아이만 홀로 남겨졌다. 아이는 엄마가 운영하던 헌책방을 다시 열고, 윗층 아저씨의 도움을 받으며 꾸역꾸역 살아간다.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아니 흘리는 법을 모른 채로. 그러다 친구 곤과 도라를 만나면서 감정을 배우게 된다. 마지막 부분은.... 읽어보시길.

이 책은 책장이 잘 넘어간다.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공감능력이 없는 아이의 캐릭터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몇군데 폭력적이고 무서운 장면이 있지만, 중학생 내 딸이 읽기에도 괜찮은 책이다. 내 딸은 공감능력이 높은 편인지 예민한건지 조금이라도 슬프고 아픈 장면이 나오면 많이 운다. 왠만하면 슬픈 책이나 영화는 꺼리는 아이다. 그나마 해피엔딩이라, 내가 추천해줬더니 몇시간만에 읽고는 펑펑 울었다. 다양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책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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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7
ㅡ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하얗게.

사랑. 사랑.사랑.사랑.사랑.사.랑.사아아라아아앙. 사랑.사랑.사.랑사.랑사.
영원.영원.영원.영.원.여어엉.워어어언.

자, 이제 의미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백지였던 내 머릿속처럼.

p81
ㅡ평범........
내가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들과 같은 것.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해서 운이 좋으면 대학에도 가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얻고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런 것. 튀지 말라는 말과 익맥상통하는 것. (중략)
모두들 '평범'이라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쉽게 입에 올리지만 거기에 담긴 평탄함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p144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건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이 예조차 아직은 너에게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