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도구일 뿐
자전적인 퀴어 소설을 쓰는 작가 K씨 소설이 이슈다. 올해 젊은 작가상을 받은 소설이라 뉴스에 나온 이유가 궁금했다. 소설 속 ‘C누나’의 실제 인물인 C가 SNS에 올린 글로 인해, 소설 속 얘기가 소설이 아님을 알게됐다. 소설에 나온 카톡 부분이 실제 C와 나눈 대화이며,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원고지 10매 가량이 그대로 소설에 실렸다고 했다. 무엇보다 주고받았던 내용이 너무나 사적이기 때문에, 'C'는 소설로 인해 자신의 성적수치심과 자기혐오감을 느꼈다며 소설의 수정을 요구했다. 얼마 전에 그 소설이 수록된 책을 구입했던 터라, 찾아서 읽어봤다. 소설이라면 문제될 것도 없는 부분이었다. 소설이기에, 카톡 내용이 실제가 아닌, 창작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소설내용이 실제이고, 등장인물도 실제임을 알아버렸다. 한 개인이 소설로 인해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 사생활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소설을 읽은 독자로서도 작가에게 배신당한 느낌인데, 작가의 지인이였던 C가 느낀 모멸감을 얼마나 컸을까. 작가와 출판사는 소설 내용으로 실제 인물이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정하지 않고 출판을 강행했다. 물론, C의 공론화로 뉴스가 퍼져나갔고, K작가의 소설이 판매 금지에 이르렀다.
소설은 픽션이다. 자신이 경험했거나 주변에서 주워들었던 일들이 그대로 옮겨 적는다면, 픽션이라기보다는 논픽션에 가까워진다. 물론 논픽션에 가까운 자전적 소설도 많다. 자전적 소설은 자기가 겪은 것들을 썼으니, 현실과 유사한 생생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도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쓰되, 사실을 그대로 쓰는 경우는 드물다.(어찌보면, 이때까지 작가들이 현실 그대로 옮겨왔어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 자신의 삶이 침해받았다고 말하며 공론화 한 사람이 없었는지도 모를일이다.) 어느 정도의 창작이 들어간다. 이번 K소설가 소설은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를 떠나, 소설에 들어간 내용이 문제였다. 어떤 내용은 세상에 밝혀져도 무방하지만, 어떤 내용은 밝혀지길 원하지 않는 사적인 영역이 있다. 자신의 얘기라면, 무얼 쓰던 상관없다. 하지만, 소설로 인해 짐작 가능한 가족들 이야기나 주변사람에 관해 쓸 때는 어느 정도 작가의 배려심이 작동해야만 한다. 쉽게 말하자면, 작가로서의 기본적 윤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설이 한 사람의 인생보다 소중하진 않으니까.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삶의 침해하면서까지 소설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창조된 가상의 인물이라면, 무얼 써도 상관없다.
수필은 논픽션이다. 모두 사실이라는 생각을 작가도 독자도 의심하지 않는다. 수필은 실제의 일이라서, 주변의 얘기를 다룰 때는 조심해야한다. 수필이라는 이름하에 나온 글이라도, 얼굴이 화끈거리기는 글이 있다. 왜 굳이 다른 사람을 욕하는 용도로 글을 이용할까, 왜 굳이 다른 이의 성적인 취향을 적을까. 굳이 드러나서 민망할 일들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소설보다 수필은 소재면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글 속에 드러난 ‘나’는 가상이 아닌 진짜 나이고, ‘지인’도 지어낸 인물이 아닌 바로 내 삶 곁에서 숨 쉬는 사람이다. 함부로 그들을 글로 뱉어낼 수 없다. 작가가 수필에서 나타낸 표현이나 이야기로 피해를 입게 하는 건 펜으로 찌르는 ‘폭력’이 아닐까.
글 쓰는 사람들은 주변에 대해 오감이 열려있다. 버스나 기차에서 옆자리 사람의 전화통화, 뒷자리 앉은 사람들의 대화, 병원에서, 음식점에서 들리는 대화와 몸짓들. 어딜 가나 타인의 삶을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삶의 곳곳에서 소재를 찾기도 하고, 살아있는 언어를 만나려고 노력한다. 여러 군상들을 보며 삶을 글로 보여주려고 애쓰기도 한다. 글도 중요하지만, 글은 삶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완벽한 인생은 없다. 완벽한 글도 없다. 그래도, 완벽하지 않은 인생을 완벽하지 않는 글로 표현하며 살고 싶다. 다만, 주변을 흐트러지게 하고 싶진 않다.
-2020년 7월 19일 뉴스를 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