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ㅡ 허수경

파랑잉크 2020. 9. 7. 23:51
뭐해요?
없는 길 보고 있어요

그럼 눈이 많이 시리겠어요
예, 눈이 시려설랑 없는 세계가 보일 지경이에요

없는 세계는 없고 그 뒤안에는
나비들이 장만한 한 보따리 날개의 안개만 남았네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길도 나비 날개의 안개 속으로 그 보따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

한데
낮달의 말은 마음에 걸려 있어요
흰 손 위로 고여든 분홍의 고요 같아요

하냥
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
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예, 하지만 아직 본 적 없는 눈동자 같아서
이 절정의 오후는 떨리면서 칼이 되어가네요

뭐해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목련, 가네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언젠가 사뒀던 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꺼내 읽었다. 독일에서 암으로 투병하다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시인. 생과 죽음을 생각한 흔적이 시의 곳곳에 보여진다. '없는 길 보고 있어요'는 자신이 없어진 곳, 혹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해 눈이 시릴 정도로 생각하는 시인. 안개속 같은 삶에서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며 인생의 덧없음을 느낀다. '절정의 오후'같은 50대. '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에서도 짧은 생의 안타까움이 보인다. '여적 그러고 있어요' 부분에서 '여적'이란 시어를 통해 생과 사에 대한 생각이 쉽게 멈추질 않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행 '목련, 가네요' 는 짧지만 찬란했던 삶이, 봄날의 목련처럼 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의 포기가 아닌, 많은 고뇌 끝에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초탈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내년 봄. 집앞 목련을 보면, 왠지 허수경 시인이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