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라디오 스타

파랑잉크 2019. 12. 18. 10:40

<라디오 스타>

 

 

식사 준비를 할 때면,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켠다. 나오는 곡마다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 이 노래. 거의 20년도 더 된 노래들이 줄지어 나왔다. 흘러나온 노래를 타고, 예전 그때로 잠시 돌아간다. 나도 벌써 옛날을 돌이켜 볼 정도로 나이가 든 건가. 이미 지나갔지만, 그저 지나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 왠지 새롭다.


개수대 옆쪽에 붙어있는 인터폰 장치에는 텔레비전/라디오 기능이 있다. 텔레비전 기능은 언젠가부터 채널이 잡히지 않았다. 예전엔 설거지를 하며, 연속극을 보곤 했지만, 요즘엔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 고장 나도 그리 답답하지 않다. 라디오는 아직 살아있다. 한동안 고정된 주파수만 들었다. 라디오는 조용한 집안을 왁자지껄하게 만들었다. 어떤 날은 활기와 유머로 가득 찬 DJ의 목소리가 기분을 띄워주기도 했지만, 때론 여러 사람이 나와 자기네들끼리 웃고 떠드는 그들만의 요란스러움이 거북했다. 조용히 음악을 듣고 싶어 주파수를 바꿨다. 익숙한 중저음 목소리가 나왔다. “김원준의 라디오 스타입니다.” ‘라디오 스타? 영화제목과 같네. 김원준? DJ도 하는 구나한 시대를 같이 거쳐 온 사람으로 그저 반갑다. ‘모두 잠든 후에를 부르던 20대의 그가 떠올랐고, 덩달아 나의 10대도 슬그머니 생각났다.


이승환, 공일오비, 푸른하늘, 엄정화, 양파, hot, god, 젝스키스, 핑클, ses, , dj doc, 변진섭, 강수지, 터보, 듀스, 부활, 서태지와 아이들, 신승훈, 김건모....... 80년대, 90년대와 2000년 초반의 가수들. 그들의 노래를 자주 들었고, 좋아했었다. 굳이 찾아 듣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면, 옛 친구라도 만났듯 반가웠었다. 라디오 스타에서는 선물처럼 노래가 마구 쏟아졌다. 알고 보니, 여긴 최신곡은 절대 틀지 않는다는 컨셉이었다. 선곡이 내게 맞춤형이다. 모르는 노래가 거의 없을 정도다. 이번 주는 이승환 주간이었다. 첫 곡으로 나온 가을흔적은 듣자마자 소름이 쫘악. 잊고 있었던, 잊히고 있었던 노래가 되살아났다.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텅빈 마음도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파를 다듬다가, 콩나물을 씻다가, 양파를 썰다가, 된장찌개 간을 보다가도 순간순간 멈칫한다. 둥근상에 둘러앉아 먹던 밥상 저편에 텔레비전을 통해 들리던 노래들, 추운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 댈 때 카세트 테이프와 레코드에서 들려오던 노래들, 늦은 밤 독서실에 엎드린 채 눈을 감고 듣던 노래들, 대학교 앞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같이 부르던 노래들, 꿈에 한 발짝 다가가려 밤새우며 듣던 노래들.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출근길에 듣던 노래들. 노래는 나와 함께 나의 젊을 날들을 지나왔다. 그저 스쳐지나갔다고 생각했던 노래들이 완전히 내 안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에 잘게 으깨져 흡수되어 있었나보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다시 예전 그 노래를 만났을 때, 내재되어있던 입자들이 알알이 깨어나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선곡된 곡들이 두 시간동안 흘러나왔다. 나오는 노래마다 어쩌면 이리도 좋기만 할까. 그때 노래가 좋았던 걸까. 그때의 내가 그리운 걸까. 라디오 스타를 통해 듣는 노래는 왠지 더 감성적이다. 어쩌면, 노래마다 어느 한 시기를 떠오르게 하는 마력을 지녀서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70년대 생에겐 라디오스타는  노래 한 곡으로도 과거 어디로든 소환해준다. 노래가 나오는 동안, 기억 속을 잠시 맴돌다 온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왔고, 지금을 살고 있는 누군가도 라디오스타를 듣고 비슷한 감정을 가지지 않을까 하고. 장소는 달라도, 같은 시간에 같은 노래를 듣고 있을 희미해진 얼굴들을 생각한다. 모두들 잘 살고 있겠지?


전기밥솥이 취사완료를 알린다. 다시 식사준비를 한다. 요즘 나는 이 시간을 즐긴다.    


-2019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