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격 ㅡ 수필미학 봄호 2020
간격
주말이라 친정에 갔다. 봄날 오후에 몰려오는 나른함과 싸우고 있을 즈음, 고추모종 200포기가 배달되었다. 아이들은 풋풋한 모종에 시선이 쏠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기다린 손님을 맞이하듯, 반가워했다. 나도 왠지 모를 설렘으로 들떴다. 우리는 필요한 연장들을 챙겨 봄볕이 내리쬐는 뒷밭으로 갔다.
밭고랑에서 일을 분담했다. 까만 비닐이 씌워진 곳에 모종을 심는 것이 목표였다. 어머니가 보여준 시범에 따라 40cm가량 되는 막대로 거리를 가늠한 후, 모종삽으로 비닐을 푹 찔렀다. 모종삽은 비닐을 뚫고 잠자고 있던 흙을 깨워 옆으로 밀쳤다. 작은 구덩이 하나가 만들어졌다. 작은아이가 모종 하나를 구덩이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큰아이는 주전자에 담긴 물을, 구덩이에 가득 부었다. 다음 차례엔, 어머니가 모종을 반듯이 세워 잡고 모종삽으로 흙을 퍼서 가만히 덮어주었다. 아버지는 심겨진 모종 옆에 튼튼한 지주대를 하나씩 세웠다. 모종들은 점점 제자리를 잡아갔다.
막대를 들고 일일이 거리를 재어가며 구멍을 뚫는 나를 보고 작은아이가 물었다.
“엄마, 왜 고추모종을 띄엄띄엄 심어?”
“간격을 두고 심어야 서로 방해받지 않고 잘 자라거든. 너무 붙어있으면 뿌리끼리 엉키고, 가지도 부딪혀 잘 클 수 없잖아. 좁으면 서로의 잎사귀에 가려 햇빛도, 바람도 제대로 닿지 못해.”
아이한테 말하고 나니, 손에 쥔 막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막대의 길이는 수많은 경험에 의해 정해졌겠지. 이 정도 거리면 고추가 잘 자랄 수 있었다는 실제적 경험들. 내게도 막대가 있던가. 내 짧은 경험으로 만들어진, 허술한 막대로 거리를 재고, 마음을 심곤 했다. 마음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갔다. 이제 그만 뻗어도 되는 곳까지 계속 뻗어가 서로의 가지는 부딪혀 부러졌다. 잎사귀가 맞닿는 곳은 짓물렀고, 바람도 공기도 통하지 않는 꽉 막힌 곳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좋은 마음도 서로가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답답하고 자유롭지 못해 오래가질 못한다. 서로를 위해 어느 정도의 간격을 존중해 주어야한다.
사람 사이에서 상처를 받으면, 다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대체로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게 된다. 좀처럼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 못하기에, 간격을 좁히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가 각자의 공간에서 성장할 수 있게 바라볼 시간. 제 안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하나의 성숙한 개체로 존재할 때, 외부의 자잘한 마찰은 쉽게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서로가 나약해서 조금만 스쳐도 서로를 부러뜨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관계는 서로가 힘들다. 어느 쪽도 쉽게 상하지 않을 가장 이상적인 순간은, 각자 자신의 뿌리가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을 때일 것이다. 허나, 외따로이 떨어져 자기 자신을 키워나가려면 문득 문득 돋아나는 외로움은 견뎌야 한다.
때론 많은 시간이 흘러도, 가늠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다. 진심이 진심으로 통하지 않고, 꼬아서 해석하는 사람들. 생각을 알 수 없으니, 가끔은 얽혀 상처를 받았고, 가끔은 더 이상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사람마다 생각의 간격은 다르다. 우리는 고추모종처럼 동질적이지 않다. 그래서인지 난 아직도 적정선을 찾지 못해 헤맨다.
내게 신묘한 막대가 있어서 상대와 나와의 적당한 간격을 측정해준다면 어떨까. 가까이할지 멀리할지 정해주는 막대. 마음을 쓰지 않아 편할 것 같아도, 정해준대로 인간관계를 맺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다. 내 생각과 의지가 빠진 맹물 같은 관계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내게 맞는 막대는 경험으로 만들어 나가더라도, 든든한 지주대 같은 존재는 하나 있으면 좋겠다.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게 해 줄 삶의 조력자처럼, 내 마음에 지주대 하나 꽂아두고 살고 싶다. 그게 사람이건, 책이건, 문학이건, 그림이건. 뭐라도 괜찮지 않을까.
모종을 심다가 허리를 펴 하늘을 올려다본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어느 정도일까. 허공 속에서 가늠해 봐도 헛일이다. 간격은 대상과 대상 사이에서 가능한 일이니까. 우선은 나부터 가다듬어야겠지. 적당한 간격으로 잘 심겨진 모종을 쳐다본다. 연약하지만 하나의 군락이 된 모종집단. 서로를 북돋우며, 가끔은 지주대에 의지하며 모두 잘 자라길….
*지주대: 이식한 수목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막고 뿌리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발육하도록 수목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막대기.
- 수필미학 봄호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