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ㅡ 최은영
대체로 10대와 20대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한 단편이 묶여진 책.
친구 사이의 우정, 사랑, 젠더 의식을 주로 다뤘다.
ㅡ그 여름
p18
"짖궂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줄곧 생각해왔다고 수이는 이경에게 말했다. "비열한 말이라고 생각해. 용인해주는 거야. 그런 말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거야.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다니."
p51
이경은 수이의 일터 맞은편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서 수이를 기다렸다. 창이 얇은 슬리퍼를 신은 발에 아스팔트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골목길에서는 시큼한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경은 쓰레기 봉투에서 흘러나온 오렌지빛 액체를 바라봤다. 그 여름이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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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지나가는 밤
p85
무언가를 이룬 게 아니라 잃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장 큰 성취를 이루었을 때조차 그 순간을 즐기지도, 자신을 격려하지도 못하는 자기 모습이 익숙하고 한심했다.
p99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p102
윤희는 주희가 추워하지 않기를, 추워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따뜻한 단잠을 자기를 바랐다. 쌀쌀한 밤, 이불이라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주희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윤희의 마음에 작은 빛을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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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모래로 만든 집
p129
한 발자국이라도 더 걸어가면 프레임 밖으로 사라져버릴 것이 분명한 피사체였다. 나는 오래도록 그 사진을 바라봤다. 작별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서 창가를 내다보았을 공무의 마음이 그 사진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p136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남을 변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은.
p152
나는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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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고백
p209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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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손길
p225
슬퍼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덜 아플 거라고 어른들은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조용히 말해주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마음이라는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
p235
언니,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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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아치다에서
p248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길바닥에 널부러진 비닐봉지 같은 존재였다고.
p275
무거운 짐을 짊어질수록 박수 소리가 커진다는 것을 알아서, 무리를 해서, 열심히 해서, 착하게 굴어서, 그렇게 조그마한 칭찬이라도 받아서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었다고.
p283
삶의 희미함과 대조되는 죽음의 분명함을. 삶은 단 한순간의 미래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