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2인실에 들어왔습니다. 전신마취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꿈인 듯이 몽롱했습니다. 그녀 곁엔 철부지 두 아이와 노부모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애써 괜찮은 듯 행동했죠. “수술 별거 아니네. 별로 안 아파.” 너스레를 떱니다. 만약 남편이 옆에 있었다면 온갖 투정을 부렸겠지요. 그녀를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워주고 싶어서, 일부러 더 밝게 웃었습니다.

어둑어둑해지자 노모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이들은 한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서 밝고 새로운 날들을 맞아야 하지요. 노모는 어린아이들이 무사히 내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할 거예요. 노부는 병실에 남아, 비어 있는 옆 칸 침대에 누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 고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인은 노부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몇 시간 전, 딸이 응급실에 있다고 전화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게다가 어서 와서 수술동의서를 작성하라고 말했으니, 정신없이 차를 몰고 달려왔을 테지요. 여인은 수술로 뚫린 구멍보다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듯 더 쓰리고 아팠습니다.

조용한 2인실의 밤. 그녀는 호흡에 열중했습니다. 전신마취 후에 폐가 쪼그라들지 않게 심호흡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의사가 신신당부하고 갔으니까요. 2시간 동안 호흡에만 집중했죠. 한숨 같은 깊은 심호흡이 없었다면 그 밤이 얼마나 더 길게 느껴졌을까요. 때로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멍하니 누워만 있었다면, 남편을 떠올리며 원망과 분노로 베개를 적셨을지도 모릅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은 저절로 약해지는 법이니까요.

그녀는 씩씩하게 아침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가시라고 보내고, 병실에 혼자 남았습니다. 팔다리는 멀쩡해서 걸을 수 있으니, 혼자서도 거뜬합니다. 불안증이 기어 나오려고 할 때쯤, 가방에 들어있던 <데미안>을 펼쳤습니다. “나는 늘 나에게 열중해 있었다. 늘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제 마침내 한 번 인생의 한 토막을 살아보기를, 나에게서 나온 무언가를 세계 안에다 주기를,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게 되기를 열렬히 갈망했다. (중략) 지금, 바로 지금 틀림없이 나의 연인이 내게로 오고 있을 거라고, 다음 모퉁이를 지나고 있을 거라고 다음 창문에서 나를 부를 거라고.” 책을 잠시 접고, 눈을 감았습니다. 눈물을 삼키다가, 다시 책을 폈습니다.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우연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욕구와 필요가 그를 거기로 인도한 것이다.” 아, 싱클레어! 단어 하나, 하나가 목소리를 얻은 듯이 깊은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심장이 아려왔고, 심장을 움켜쥔 손이 떨렸습니다. 불안한 그녀는 싱클레어에게 동화되었습니다. 눈물 몇 방울이 답답한 마음을 조금 씻어 주었습니다. 누워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저 멀리 있는 누군가를 그리듯이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고요한 평안을 느꼈고, 삶이 이대로도 괜찮다고 여겨졌습니다.

노모가 다시 왔습니다. 병실에 혼자 있을 딸이 마음 쓰였나 봅니다. 손녀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모두 보내고, 서둘러 왔습니다. 노모는, 아이들이 훌쩍 커서 자기 할 일도 스스로 잘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며 대견스럽답니다. 노모의 얘기 속 아이들은 다른 집 아이처럼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녀 앞에서는 사소한 걸로 매일 싸우기만 하는 녀석들이니까요. TV를 보다가 노모는 스르륵 낮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노모를 보며 아이가 전화로 해준 말이 기억납니다. “엄마, 할머니가 수술실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수술현황판만 계속 바라봤어.” 낮은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는 노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딸 걱정은 잠시 잊으시고 편히 주무세요.

오후에는 새로운 여인이 왔습니다. 이제 2인실은 다 채워졌습니다. 그 여인도 자신의 노모와 함께였지요. 다음날 수술을 앞둔 상태라 불안해 보였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불안한 심사를 얘기했습니다. “전신마취 했다가 안 깨어나면 어떡해? 저번처럼 정신 못 차리면 어떡해?” 노모가 딸을 달랬습니다.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야.” 2인실에는 한창 피어 있어야 할 딸들이 침상에 누워있고,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는 두 노모가 딸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무거운 공기가 병실을 채웠고 엷은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답답함을 숨길 곳이 없는 딸들은 벽 쪽으로 돌아누웠습니다. 두 여인의 노모들은 아이들을 돌보러 가고 이제 2인실에는 두 여인만 남았습니다.

깜깜한 밤이 밀려오는 시간, 둘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두 여인은 이미 느낌으로 서로를 알아봤고, 왜 6인실이 아닌 2인실을 택했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나이가 같았고, 이른 나이에 이별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한 여인은 6년 전에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었고, 또 다른 여인은 2년 전에 병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었습니다. 서로의 말에 놀라거나 크게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저 각자가 경험하고 지나온 일들을 들려주고 듣습니다. 서로의 삶을, 서로의 아이를, 서로의 잃어버린 사랑을 얘기합니다. 어떻게 이런 만남이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연이 아닌 필연일까요.

한 명은 수술 후 퇴원을 앞두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다음날 수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술하지 않은 여인은 전신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봤기에 더 두렵습니다. 먼저 겪은 여인은 괜찮을 거라고 걱정 마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압니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무엇보다 아이 때문에 걱정이 부풀어 오릅니다. 어린 자식이 있으면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어서 더 무섭죠. 뭐든 직접 겪어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생각이 많을 때는 잠이 명약입니다. 다음 날, 먼저 입원했던 여인은 퇴원을 준비했습니다. 나중에 들어온 여인은 수술을 준비했습니다. 짐을 다 챙기고 퇴원하며 말했습니다. “수술은 별거 아니에요. 잘될 겁니다.” 불안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습니다. 고개를 끄떡이는 그녀의 눈을 오래 볼 수 없어서 빠르게 병실을 빠져나왔습니다.

외래진료를 가는 날, 2인실에 같이 있었던 여인이 생각납니다. 수술은 잘 되었을까. 아픔은 잘 아물고 있을까. 계속 신경이 쓰이지만 찾아가지는 못합니다. 하룻밤의 만남이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데미안>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가끔은 길을 헤매어도 하루하루 조금씩 단단해지면서,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내 안의 네비게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입력합니다. 조금 불안해도 오늘을 출발합니다.


                                                        ㅡ 정은아

배를 움켜쥐고 응급실에 도착했다. 진료 접수 후 간이침대에 누웠다. 간호사는 내게 이것저것 물었고, 몇 가지 검사가 필요하다며 잠시 대기하라고 했다. 병원에 오면 아픈 사람이 천지다. 일요일 오후 4시. 이곳에 모인 이는 어딘가 아프다.

꼬마가 침대에 누워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기울인 여자가 아이를 토닥였다. 한 발짝 옆에 선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주변을 둘러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링거를 맞는 할머니 옆에 중년 여자가 큰소리로 호통치듯이 통화를 했다. 덩치 큰 남자에게 몸을 기댄 채 응급실로 들어서는 자그마한 여자도 있었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아저씨는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대며 내 앞을 지나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의사가 슬리퍼를 끌고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피검사, CT, 초음파 검사 등의 결과가 나왔단다. 소위 맹장이라고 부르는 충수에 염증이 생겼단다. 염증 수치가 높고 충수 부위가 많이 부어 있어서 수술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보호자는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내가 아이들의 보호자인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내게도 보호자가 있어야 했나. 내 보호자는 누구지. 결혼 전에는 부모님, 결혼 후엔 남편. 보통 그러하다. 배가 더 아파지는 것 같았다. 머뭇대고 있으니, 의사가 다시 물었다.
“보호자 같이 안 왔어요?”
의사는 내게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보호자가 빨리 와야 오늘 내로 수술받을 수 있어요.”
내가 핸드폰을 꺼내 들자, 의사의 슬리퍼 소리는 멀어졌다.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놀라지 마세요. 배가 아파서 응급실 왔는데 맹장염이래요. 수술동의서에 사인해야 한대요. 아버지, XX병원에 와주세요.”
“애들은? 같이 있냐?”
“집에 있어요. 엄마한테는 애들 좀 부탁해요.”
“알았다. 곧 가마.”

산통에 버금갈 복통이 이어졌다. 고통이 잠시 잦아들 때면 주변이 또렷이 보였다. 그저 서로를 지켜봐 주는 흔하디흔한 사람들의 모습. 별것 아닌데 별것이 되는 순간. 육체의 통증이 내면의 가장 취약한 곳을 찾아내 찔러댔다. 굳이 찾아서 드러낼 필요가 없는데도 쉽게 들키는 허점을 지닌 곳.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마음이, 몸이 아프면 왜 이리 물러 터지는가 싶다. 사방이 트인 간이침대가 불편했다.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니 커튼을 칠 수 있었다. 외부의 시선과 밖으로 향하는 나의 시선을 다 차단하듯이 커튼을 쳤다. 오직 ‘나’만 남은 공간.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을 자유로움. 다른 면으로 보면 고립인가. 사람은 원래 혼자야. 괜찮다. 괜찮다. 이런 상황을 또 만들지는 말자. 아프지 말자. 나는 아프지 말자. 직육면체 안에 나를 가두고, 오지 못할 보호자와 내게 오고 있을 보호자를 기다렸다. “괜찮으세요?” 커튼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네.” “보호자는 오셨어요?” “오는 중이에요.” 커튼을 반쯤 걷었다.

나를 돌봐줄 보호자들이 응급실을 두리번거렸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그들에서 팔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뒤를 따라서 할머니 손을 잡고 종종대며 걸어왔다. 엄마는 딸이 수술할 동안 집에서 기다리는 게 더 힘들다고 판단했나 보다. 사위를 사고로 잃고 난 후,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걱정으로 출렁거리곤 했다. 애써 담담한 척하셔도 찌푸려진 미간과 흔들리는 눈동자는 감출 수 없었다. 아이들은 밝다. 그래서 좋다. 수술하면 괜찮다고 하니,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할아버지를 졸랐다. 아버지는 수술동의서에 사인하고 아이들과 편의점에 갔다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제 뭘 해도 문제없다. 난 혼자가 아니다. 스스로를 가둔 내가, 나를 해방했다. 아이들이 사탕을 빨며 간이침대에 붙어 서서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나를 걱정하는 얼굴과 그 속에 담긴 마음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서서히 침대가 움직였다.
“수술 잘하고 와라.”
목소리로 전해지는 격려에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푸른빛 조명 아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수술실은 덜덜거릴 정도로 추웠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기계음 소리도 계속 들려왔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가벼운 농담을 섞어가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긴장을 풀기 위해서일까. 곧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마취약 들어갑니다.”
어느 순간 의식이 흐릿해졌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나이 든 보호자들과 어린 보호자들, 그리고 올 수 없는 보호자를 떠올렸다.
‘이제 곧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 마요.’

좋은수필(7월호)에 실렸던 글이 The 수필에 실렸다. 감사한 일이다. 책속에서 모인 60인의 글과 삶을 들여다보며 연말을 보낼 것 같다.
황당하고 무서웠던 계엄에 이어, 심장 졸이게 했던 탄핵가결을 지켜봤다. 불안했던 마음이 여전히 가라앉질 않는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답답하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국민이 우선인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내년엔 안정된 새로운 세상이길 바래본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수필을 읽으며, 마음만은 뜨끈해지고 싶다.


<더수필을 보니,  더 수필을 쓰도록 애써야겠다>

많이 생각하는 날>>>
                                                            정은아

그날은 비가 왔다. 장마철이라 어두침침하고 습했다. 잠든 아이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던 빗소리. 안과 밖이 극명한 대비를 이뤄도, 내겐 나른한 오후일 뿐이었다. 거실 매트 위에 누워 아이의 분유를 주문하려고 온라인 쇼핑몰을 두리번댔다. 고요를 깨트리며 전화가 울렸다. 전화로 들려온 말이 비현실적이라 거짓 같았다. 어찌할지 몰라서, 거실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말도 안 돼’만 중얼거렸다. 심장박동은 제멋대로 날뛰었고, 비바람은 끊이지 않고 몰아쳤다. 그때 나는 ‘아내’의 역할을 잃었고, 아이들의 유일무이한 부모가 되었다. 매년 그날이 다가오면, 태엽을 거꾸로 감듯이 그날 오후 4시로 되돌아갔다. 그러면, 빈 가슴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달력에 새겨놓지 않아도, 몸이 그날을 기억하는지 몸살을 앓는다.



나는 성격상 특정한 날을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었다. 남편과 사별 후에는 어떤 기념일도, 어떤 명절도 무심하게 지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어떤 날의 기억은 상처를 헤집어 놓는다. 결혼 후 나의 첫 생일날, 남편은 장미꽃 한 송이를 내게 내밀었다.
“은아야, 장미꽃 한 송이라 미안해. 매년 생일마다 한 송이씩 늘어날 거야. 100송이가 될 때까지 잘 살자.”
약속은 고작 5송이에서 깨졌다. 만약 사고가 없었다면, 장미꽃은 계속 늘어났을까. 누군가를 챙길 일도 챙김을 받을 일도 없는 사람은, 반복되는 평일보다 이름이 붙여진 특정한 날이 더 외로운 법이다. 요즘은 생일날이 돌아오면, ‘삶이 1년 더 갱신되었습니다’라고 알려주는 느낌이 든다. 축하의 의미도 마치 생존의 기쁨을 나누려는 작은 의식 같다. 그래서 죽은 사람은 생일을 잘 챙기지 않는 것일까. 갱신될 삶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죽어야만 챙기는 날이 있다. 옛날부터 ‘제삿날’, ‘기일’, ‘회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고인이 된 사람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챙겼다. 자기 자신은 챙길 수 없으니, 남겨진 이들에게 의무처럼 주어지는 날이다. 365일 중 하루. 그래도 남겨진 사람에게는 다른 날의 24시간보다 가슴이 뻐근하다. 남편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사고사라서 뇌 어딘가에 선명한 흔적을 남긴 걸까.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아픔을 되새김하게 만든다. 나는 남편의 ‘제삿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편과 좋았던 날들도 많은데, 굳이 사고가 난 날을 고통스럽게 다시 생각해야만 할까. 남편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 날 이후로, 기일이 돌아올 때면 하루가 빨리 흘러가길 염원했다.

처음 몇 년간, ‘제사’라는 이름으로 의식을 올렸다. 어머니는 사위를 위해 나물이며 떡, 생선 등의 제사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오셨고, 아버지는 붓글씨로 제문을 써서 오셨다. 부모님에게 제사는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돌아가신 조상에게 예를 갖추어 대접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가정과 후손이 평안해질 수 있는 전통 의식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위에게 지내는 제사는, 딸과 손녀를 잘 돌봐주길 바라는 마음과 사위를 향한 안타까움을 전하는 마음이다. 어머니는, 제사가 많은 집안에서 평생을 살아왔으면서도 사위 제사까지 챙기려고 했다. 제삿날 며칠 전부터 제사장을 보고, 새벽부터 음식 재료를 다듬고 삶았다.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아버지는 홍동백서, 조율이시를 따져가며 상을 차렸고 제례에 맞춰 의식을 치렀다. 두 분이 애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제사의 여정이 무거운 짐처럼 여겨졌다. 그냥 엎드려 울고만 싶었다. 기일을 다르게 보낼 수는 없을까.

또다시 그날이 돌아왔다.
“얘들아, 오늘은 아빠를 많이 생각하는 날이야.”
A4 한 장을 꺼내 우리만의 제문을 만들었다. 우선, 백지를 3등분으로 접었다. 백지 가운데 부분은 내 자리다. 남편에게 쓰고 싶은 말을 차분히 적었다. 롤링 페이퍼처럼 아이들에게 종이를 돌렸다. 종이 왼쪽엔 큰아이가 아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오른쪽엔 작은 아이가 적고 싶은 것을 썼다. 아이들은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도, 뭔가를 적었다. 편지 같은 제문이 완성됐다. 음식은 남편이 좋아했거나 우리가 저녁으로 먹을 음식들을 주로 차려 놓았다. 밥, 소고기뭇국, 치킨, 수박, 바나나. 때로는 보쌈, 떡, 두부 부침, 호박전, 피자…. 그때그때 다르다. 잊지 않고 꼭 챙기는 것은, 그가 좋아하던 캔맥주 한 캔. 핸드폰에 담긴 남편의 사진을 찾아 상 위에 세우고, 간단하게 절을 올렸다. 나는 남편을, 아이들은 아빠를 생각했다. 원래 식성이 좋았던 사람이라, 맛있게 잘 먹고 있을 거다. 편지를 읽고, 왼쪽 뺨에 보조개를 지으며 웃고 있지 않을까. 햇빛이 유난히 쨍한 날, ‘많이 생각하는 날’은 잔잔하게 지나갔다.



ㅡ풀지 못하는 자물쇠
 

정은아

 
무의식이 말했다. 이제 끝이라고.
수많은 흰색 운동화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신발을 무작위로 마구 던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나는 신발 한 짝을 신은 채로, 나머지 한 짝을 찾고 있었다. 내 운동화는 흰 끈으로 매어져 있고, 다른 것들은 끈 없이 밋밋했다. 한쪽 다리로 휘청대며 끈이 있는 신발을 찾으려고 애썼다.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대는데, 버스가 경적을 울렸다. 조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있는 신발 중 한 짝을 신었다. 긴 바지 아래 감춰진 짝짝이 운동화. 똑같은 흰색이라 얼핏 보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탔어도 얼떨결에 신고 온 신발 한 짝과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이 신경 쓰였다.
꿈이었다. 꿈을 맹신하진 않지만, 그 꿈은 유난히 선명했다. 스마트폰으로 꿈 해몽을 검색했다. 한쪽 신발을 잃는 꿈은 반려자의 죽음을 의미하고, 신발 한 짝을 다른 신발로 바꿔 신는 꿈은 새로운 사람이 생기거나, 다른 직업이나 일을 가지게 되는 것이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미 잃어버린 반려자를 왜 다시 잃는다는 건가. 그를 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내 무의식까지 파고 들어간 걸까.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미안했다. 이런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서, 갑자기 내게로 밀려오는 걸까.
 
얼마 전, 시아버지의 부고를 문자로 받았다. 그가 없는 시가媤家는 끈이 끊어진 곳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람의 도리나 규범을 따져보자면, 당장 달려가 며느리 역할을 하고 슬픔을 같이 나눠야 한다. 하지만, 나는 시집 식구들과 연락이 끊긴 지 몇 해가 지났다. 모든 서류가 정리된 후에는, 명절에만 연락이 오가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과거의 장소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남편만 빠진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까. 어떤 사건은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에게 그랬나 보다. 육체적 외상과 달리 정신적 외상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대처하기가 어렵다. 나만 알고 느끼는 것이라 고립감마저 느껴진다. 회복이 되었나 싶다가도 자잘한 기억이 떠오르면, 한순간에 무기력해진다. 순간순간 무너지고, 살아가기 위해 다시 일어난다.
큰형님에게 다음날 가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기차표를 예약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밤새 뒤척거렸다. 춥지도 않은 따신 날에, 온몸이 춥고 욱신거렸다. 가슴에 통증도 느껴졌다. 카디건을 입고 웅크리고 누워도 여전히 아팠다. 힘들어하다 잠깐 잠이 들었다. 새벽 4시 37분. 또 잠이 깼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내 몸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불쑥 나와 버렸다. 멈출 수 없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아, 가슴을 두드렸다. 울면서도 생각했다. 도대체 이 울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이리도 슬픈 걸까. 사무친다는 말, 나는 싫어한다. 하지만 난 지금 사무쳤나 보다. 그 일이, 그 사람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놓아주질 않는지도 모른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울다가 선명해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물을 닦았다. 차가운 물로 퉁퉁 부은 눈을 눌렀다. 다시 나는 원래의 ‘고요한 나’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 앞에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강인한 내가 필요하니까. 실컷 쏟아낸 후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구로역을 지나갔다. 연애할 때 자주 머물던 역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둘이 같은 곳을 바라보곤 했다.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있던 곳. 저 지점 어딘가에 무언가 환영幻影처럼 떠올랐다. 현실에는 그 남자도, 그 여자도 없다. 우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닮은 사람이라도 찾듯이 둘러봤다. 찾을 수 없는 우리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역에서 엄마랑 아빠가 많이 만났어.” 그 말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구로역 승강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우리는 잊힌 과거로 답사를 온 듯했다.
부천에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부천은 남편의 형제들이 사는 곳이라 언제나 그와 함께 오곤 했다.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초췌해진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형님이 먼 길 와줘서 고맙다고 내 손을 꼭 쥐었다. 시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어찌 된 일인지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새벽에 다 쏟아부어 버려서 그런가. 난감했다. 남편의 장례식 때, 시아버지가 나를 꾸짖던 기억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아들 앞세운 속상한 마음에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에 박혀 쓰렸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온 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부디 거기서는 평안하시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장례식장을 나와, 인천가족공원에 갔다. 남편이 있는 주소는 만월당 ‘2-8XX번’이다. 단단한 유리로 막힌 아주 작고 네모난 공간이다. 그 안에는 봉안함과 액자가 놓여있다. 봉안함 안에는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된 그가 있고, 액자 속에는 우리 가족이 환하게 웃고 있다. 맨 아래쪽에 자리한 그를 보려고, 주저앉았다. 여전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의 나와 달랐다. 그곳은 죽은 자들만 모여있어 조용했다. 침묵한 아빠와 마주 앉은 아이들은 어색한지 자꾸만 나를 돌아봤다. 다 같이 사진을 찍고, 잘 지내라고 말하고는 뒤돌아섰다.
서울역에서 배를 채웠다. 헛헛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더 채워야만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근처에 남산이 있다고 말해주니 가고 싶다고 했다. 20대 때, 서울역 근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면, 그가 나를 기다렸다. 그와 같이 걷던 거리를, 아이들과 걸었다. ‘서울로’라는 구름다리가 보였다. 서울이 변했고, 나도 변했다. 오랜만에 높은 구두를 신었더니, 발이 아팠다. 공허를 경감시켜줄 아픔이, 오히려 반가웠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천천히 남산을 둘러봤다. 수천 개도 넘는 사랑의 자물쇠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저 수많은 사랑의 맹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이는 자물쇠를 풀고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을까. 잊힌 자물쇠를 풀어줄 열쇠는 영원히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풀지 못하는 자물쇠는 철조망 한 귀퉁이에 매달린 채, 기약도 없이 갇혔다. 자물쇠는 굳게 잠긴 채로 녹슬고, 낡아간다. 둘이 같이 바라보던 곳에서, 아이들과 같이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다. 발은 더 아팠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적 공허는, 남산 계단에서 비실거리는 육체 때문에 시들해졌다. 남산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보이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눈빛으로 반짝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보챘다. “제발 그만 보고 가자.”
 
며칠 후, 흰 운동화 꿈을 꿨다. 친구에게 꿈 얘기를 했더니, 시간이 흘렀으니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했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도 없고, 너도 너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좀 자유로워지라고도 했다. 고마운 말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를 떨쳐낼 수 없다. 이렇게 글을 끝내려다 다시 생각했다. 삶의 어떤 것이든 해석이 중요하다. 운동화 꿈이 글 쓰는 삶의 시작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글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지만, 앞으로는 글이 내 삶의 일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무의식이 알려준 건 아닐까. 풀지 못할 무언가에 매여 있는 삶이라도,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_2018년 초여름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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