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좋아 캘리그라피로 필사했다.
뭐해요?
없는 길 보고 있어요

그럼 눈이 많이 시리겠어요
예, 눈이 시려설랑 없는 세계가 보일 지경이에요

없는 세계는 없고 그 뒤안에는
나비들이 장만한 한 보따리 날개의 안개만 남았네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길도 나비 날개의 안개 속으로 그 보따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

한데
낮달의 말은 마음에 걸려 있어요
흰 손 위로 고여든 분홍의 고요 같아요

하냥
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
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예, 하지만 아직 본 적 없는 눈동자 같아서
이 절정의 오후는 떨리면서 칼이 되어가네요

뭐해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목련, 가네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언젠가 사뒀던 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꺼내 읽었다. 독일에서 암으로 투병하다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시인. 생과 죽음을 생각한 흔적이 시의 곳곳에 보여진다. '없는 길 보고 있어요'는 자신이 없어진 곳, 혹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해 눈이 시릴 정도로 생각하는 시인. 안개속 같은 삶에서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며 인생의 덧없음을 느낀다. '절정의 오후'같은 50대. '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에서도 짧은 생의 안타까움이 보인다. '여적 그러고 있어요' 부분에서 '여적'이란 시어를 통해 생과 사에 대한 생각이 쉽게 멈추질 않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행 '목련, 가네요' 는 짧지만 찬란했던 삶이, 봄날의 목련처럼 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의 포기가 아닌, 많은 고뇌 끝에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초탈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내년 봄. 집앞 목련을 보면, 왠지 허수경 시인이 떠오를 것 같다.
진눈깨비가 슬슬 내리는 강기슭 마른 갈대 끝에 앉아
엄마! 하고 소리치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도
가는실잠자리는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살얼음이 살짝 언 겨울강을 건너다가
아이들 몇 명이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도
가는실잠자리는 오직 갈대 끝에 앉아 파르르 날개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가을의 어느 푸른 날처럼 신나게 저공비행을 하면서
아이들의 손을 힘차게 잡아 끌어올리고 싶었으나
그만 차가운 바람에 떨며 갈댓잎만 몇 번 흔들고 말았던 것이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낚싯배를 타고 강 깊숙이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찾던 사람들이
시체를 찾다 말고 하나 둘 강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새우깡을 안주 삼아 몇 차례 소주잔을 돌리는 것을 보고
가는실잠자리는 몇 번이고 실 같은 꼬리만 도르르 말아올렸던 것이다
더러 담배꽁초를 강물에 내던지거나
말없이 소주만 연거푸 들이켜는 남자들 곁에 퍼질고 앉아
여자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꾸 울음을 터뜨려
가는실잠자리는 그만 죽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겨우내 온몸에 친친 감았던 햇살을 풀어
잠시 여자들의 목에 목도리인 양 걸어주는 일 외에는
탁탁탁 불똥이 튀는 모닥불 위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진눈깨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가는실잠자리는 슬펐던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서사적 구조를 가진 시다.
가는실잠자리의 묘사와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안타까운 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말없이 소주잔만 연거푸 들이키는 남자들, 아이 이름을 부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들. 남겨진 이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슬프다.
이미 하얀 집에 눈까지 내리는 건
어떤 소용이 있어서 그러는 건가요

금방 사라졌다가 며칠 만에 다시 눈이 내려요
이번에는 오래 흘리다 가줄까요?

눈이 쌓이는 만큼 빛은 자기를 최대한 펼쳐놓아요
펼쳐서 얻는 게 별로 없을 텐데도
사람 좋은 사람처럼 자신을 바닥에 널어요
저렇게 물도 들지 못하고 웃으며 사는 것 좀 보세요

눈은 그렇듯 쌓이듯 모여서
골목까지 아낌없이 생기를 펼쳐놓아요

불편하면 고개를 저어도 될텐데
절대 그러지 않아요
사랑받고 싶은 것이겠지요

눈이 저러는 동안
바다는 꾸준히 여전히
줄었다 늘었다 반복해요
사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겠지요

눈 쌓인 섬도
살결이 푸른 바다도
전부 사람의 마음을 흔들지만
내겐 아무 소용이 없어요

당신과 함께 보면 좋을 일들이 전부
사느라
아무 소용이 없어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당신과 함께라면 좋았을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이 없기 때문에.
힘들면 인상도 찡그리고, 못살겠다 한탄을 할만도 한데, 억지 웃음을 지으며 산다. 이 시 참 짠하다.
참다못한 편지가
소리치기로 작정한 순간

확인했습니다

두 줄짜리 글에는
몇 달치의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여전히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그렇고 그런 말들
내가 입기엔 너무 큰 말들
비가 그쳤는데 급하게 우산을 펼치는 말들

힘을 잃은 나는 창밖에 바다가 채갑니다
그러고는 볶습니다
이미 열여섯 번 볶아진 적 있습니다

바다가 뱉어낸 몸은 매일매일 아픕니다
아무도 안쓰러워 안 합니다

아파도 도달해야만 하는 지점을 기억하는데
나는 자꾸만 때를 미루고 있습니다
치과나 병원이면 이렇게 미루지 않았을 겁니다

차오르다 차오르다 뚜껑만 닿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됩니다

손수건 한 장이 나를 안쓰러워합니다

손수건 한 장은
아슬아슬하고 별 것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내일도
바다가 나를 채갈 겁니다
자꾸 울면
내 눈에만 보이던 게
내 눈에만 안 보일 겁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무도 안쓰러워하지 않은 이를
손수건 한 장이 안쓰러워한다.
감당하기엔 힘든 슬픔이기에
자꾸 운다. 아파도 해야 할 일이 있고
어떻게든 살아야하는데
차오르는 아픔을 좀처럼 잠재우기 힘들다.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 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건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는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ㅡㅡㅡㅡㅡㅡㅡ
피식 웃게 만드는 시다. 어떤일을 결심을 하고 실천에 옮기는 건 쉽지않다. 금주 결심을 했으니, 지키고는 싶다. 그런데 날이 꾸물하니 마시고도 싶고. 참 난감하다. 점점 의지는 줄어들고 합리화 하기 시작한다. 굳이 뚝심있게 지켜야 할 이유가 뭐냐고. 나도 호락호락한 인간이라, 충분히 이해가 된다.
가장 이상한 세 단어
ㅡ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언가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노벨상 수상소감 중에서 _끝과 시작]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이 작품 또한 일시적인 답변에 불과하며,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통감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번 더', 또다시 '한 번 더', 시도와 시도를 거듭하게 되고, 훗날 문학사가들은 어떤 시인이 남긴 계속되는 불만족의 징표들을 모두 모아 커다란 클립으로 철하고는 그것들을 가리켜 '시인이 일생동안 쓴 작품'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소감문에서도 겸손이 느껴진다.
이때까지 그녀를 몰랐다니...
이제라도 그녀를 알게되어 참 좋다.
해 질 녁 복도를 홀로 걸어가던 어린 날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잠들기 전 올려다본 천장의 어둠 너머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자신들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물과 사건들, 부드럽고 따뜻한 대기 현상을 일으키는 감정들에 대해 말하려 한다

다섯 살 난 조카가 다가와 인생의 비밀을 털어놓을 때는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만이 전해져 오고, 알겠다며 같이 놀라는 시늉을 해야만 한다

그 모든 것이 세계의 깊숙한 곳과 연결된 것처럼
혹은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처럼

어린 나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무작정 집을 나선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았는데 자꾸 어딘가에 당도하는 것이 너무 무섭고 이상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때론 내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가기도 한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 어떤 전조도 없이 내게 배달된 운명. 가끔 어떤일은 반품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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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빙
ㅡ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커피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나도 떠내려가고 있는 듯하다.
난 시계의 흐름에 맞춰 현재를 살고, 그 사람은 시계 반대 방향인 과거에 산다.
서로에게 행했던 입김과 눈물들로 얽혀, 쉽게 놓아버릴 수 없던 우리들. 단단한 눈뭉치 같던 너와 나.
잘게 부서진 모래알갱이처럼, 사그라드는 물거품처럼
언젠가는 부서지고 사그라든다.
ㅡㅡㅡㅡ
이 시에서 '입김'은 때론 뜨겁고 때론 차갑지만 서로를 위한 행위로 이어진다. 뜨거운 음식을 식히거나 언 손을 녹이는 선한 행위다.
코로나가 활개를 치는 요즘엔,
누구든 입김을 느낄 수도 없고, 닿는 것조차 꺼린다.
자신의 입김을 자신 안으로 삼키고,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마스크로 차단한다. 다만,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입김이 허용된다. 그 사람의 행적을 아는 것으론 부족하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서로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입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시집 '섬' 중에서)
ㅡ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ㅡㅡㅡㅡㅡㅡㅡㅡ
내게 사람이 풍경일 때>
고향집을 나설 때, 자동차 백미러로 보이는 손흔드는 아버지와 어머니.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마중 나갔을 때,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아이.
혼잡한 쇼핑몰 앞에 서 있는 나에게, 손 흔들며 인파들 속을 헤치며 가까이 다가오던 그 사람.
자신의 일처럼 축하해주던 선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의 미소.
마당에서 왁자지껄 얘기하며 고기 구워 먹던, 어느 여름날의 가족들.
가만히 내 얘기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
콧등에 밴드 붙이고 방역복을 입고 병실로 향하는 의료진. 담담하고 차분히 코로나 현황을 전하는 질병관리본부장.

하나의 풍경처럼 찰칵.
내 마음 한 곳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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