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게 ㅡ이성복

 

빛이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빛은 왔어

균열이 드러났고

균열 속에서 빛은 괴로워했어

저로 인해 드러난 상처가

싫었던 거지

빛은 썩고 농한 것들만

찾아 다녔어

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

아무도 그 몸무림 잠재울 수 없었어

지쳐 허기진 빛은

울다 잠든 것들의 눈에 침을 박고,

고여 있던 눈물을 빨아 먹었어

누구라도 대신해

울고 싶었던 거지,

아무도 그 잠 깨워줄 수 없고

아무도 그 목숨

거두어줄 수 없었으니까

언젠가 그 눈물 마르면

빛은 돌아가겠지,

아무도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아무도 태어나지 않고

다시는 죽지 않는 곳,

그런 곳에 빛이 있을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빛의 속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

내가 생각하던 빛의 이미지를 뒤엎어버림.

빛이 없어서 상처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행복할 수 있을까.

드러나지 않아도 아픈건 어쩔 수 없지.

드러나도 이겨낼 수 있게 빛이 옆에서 도와주니까

빛은 필요해.

 

처음부터 빛이 없으면 암흑.

거긴 아무 것도 없겠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빙 ㅡ신철규  (0) 2020.05.19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ㅡ 정현종  (0) 2020.05.09
가을의 말ㅡ박준  (0) 2020.02.04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_유희경  (0) 2019.12.22
조용한 일- 김사인  (0) 2019.10.24

 

가을의 말 ㅡ박준

 

그렇게 들면 허리 다 나가 짐은 하체로 드는 거야 등갓 잘 보고 모서리 먼저 바닥에 놓아 아니 왼쪽으로 조금 더 왼쪽으로,

 

가는 말들 지나

 

외롭지? 그런데 그건 외로운 게 아니야 가만 보면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도 외로운 거야* 혼자가 둘이지 그러면 외로운 게 아니다,

 

하는 말들 지나

 

왜 자면서 주먹을 쥐고 자 피 안 통해 손 펴고 자 신기하네 자면서도 다 알아,

 

듣는 말 지나

 

큰비 지나, 물길과 흙길 지나, 자라난 풀과 떨어진 돌 우산과 오토바이 지나, 오늘은 노인 셋에 아이 둘 어젯밤에는 웬 젊은 사람 하나 지나, 여름보다 이르게 가는 것들 지나, 저녁보다 늦게 오는 마음 지나, 노래 몇 자락 지나, 과원 지나, 넘어짐과 일어섬 그마저도 지나서 한 이틀 후에 오는 반가운 것들

 

*이문재 시인의 취한 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 이틀 후에 반가운 소식이 오면 좋겠다.

마음을 살짝 내려놓는 주문처럼.

그런 마음으로 살래.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유희경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제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얆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 찾아올 곳이 없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당신을 한 벌의 수저와 묻는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무덤

먼지의 뒤꿈치들, 사각거린다


-------------------------------------

티셔츠에 목을 넣는 짧은 시간, 작가는 사유한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은 언제든,어디서든 가능하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에게 ㅡ 이성복  (0) 2020.02.16
가을의 말ㅡ박준  (0) 2020.02.04
조용한 일- 김사인  (0) 2019.10.24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이제니>  (0) 2019.10.20
잉여의 시간- 나희덕  (0) 2019.06.21

조용한 일

-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2014년 3월, 4살인 둘째딸이 처음 어린이집에 등원한 날.

어린이집 적응기간이라 2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근처 도서관에서 대기했다.

고작 두시간의 자유에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오로지 나혼자만의 시간. 그 도서관에서의 고요함.

내 곁에 책 몇 권. 글 몇 줄. 행복이 별건가.


도서관 한 켠에서  이 시를 읽던 순간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이제니>


 접어둔 꿈을 펼친다. 너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었고. 텅 비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네 자신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연약하고도 슬픈 기질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너를 문장이라는 말의 그늘로. 아니. 문장이라는 종이의 여백으로 이끌었고. 혼자만의 방에서도 오래도록 외롭지 않았던 것은. 네 오랜 꿈의 원형인 듯 책상 한구석에서 타오르던 어둡고 희미한 불꽃이. 매 순간 너와 함께 네 마음속에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접어둔 꿈을 펼친다. 거리는 거리로 이어지고 집은 집으로 이어져. 첫번째 집은 문이 없었고. 쉽게 다음으로 건너뛰지 못하는 미련한 마음이 다음 집과 다음 집도 첫번째 집으로 오인하도록 하였기에. 결국 네가 찾고 있는 것은 열리지 않는 문이라는 듯이 너는 너 자신을 속였으나. 이내 문이 있는 집이 나타났고. 당연하게도 너는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고. 지금껏 줄곧 그래왔듯이 너는 첫번째 집을 헤매듯 다음 또 다음으로 천천히 천천히 집과 집 사이를 건너뛰었고. 결국 네가 찾고 있는 것은 문이 없는 집이라는 사실을 너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까 결국. 끝없이 바깥으로만 바깥으로만 떠돌도록 네 모종의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너는 인정해야만 했고. 건너뛰어 가는 동안. 종이 위로 새겨지는 네 목소리 위로 또 다른 목소리가 내려앉는 것을 너는 보았고. 들었고. 그것은 오래도록 내뱉지 못한 네 입속말의 부스러기들이었고. 바깥으로 향하는 목소리를 따라. 그렇게 바깥으로 향하는 공간으로 뛰어들기를 반복하여서 다시금 어제의 밤은 몰려왔고. 그러면 이제 무언가를 붙잡아야만 한다고. 그러면 이제 어딘가에 도착해야만 한다고. 그러나.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들여다보듯이. 희미한 것들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빛의 둘레로부터 어른거리며 물러나는 무언가를 너는 보았고. 들었고. 그 어렴풋한 그림자야말로 네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아니. 네가 잊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떠올렸고. 손을 펼치면 저 너머로부터 말들의 그늘이 번져오고 있었고. 더 이상 많은 낱말과 낱말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더는 숱한 비유와 비유로 문장을 꾸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너는 뒤늦게 알아차렸으나. 심연을 향해 나아가듯 같은 낱말이 또 다른 뜻으로 너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너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고. 연필을 쥔 너의 손가락은 어느새 종이 위를 빠르게 미끄러져갔고. 글자가 아닌 그림처럼. 그림이 아닌 음악처럼. 어떤 시선을. 어떤 흔적을. 어떤 공백을. 너는 읽으면서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심해로부터 번져오듯 같은 낱말이 다시 다가오면서 물러나고 있는 것을 너는 느끼면서. 자신의 표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문장을 인용하는 무수한 얼굴을 생각했고. 그리하여 다시. 마주보는 이중의 거울 속에서. 끝없이 끝없이 맺히며 펼쳐지는 거울상의. 그 어떤 예비된 묵시들처럼. 그리하여 다시. 꿈은 어디로부터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빈칸을 건너뛰듯 희미한 보폭으로 사라져가는 저 무수한 길 위에서. 한 줄 건너뛰면 다시 한 줄 흔들리는 저 무수한 나뭇가지 사이에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_유희경  (0) 2019.12.22
조용한 일- 김사인  (0) 2019.10.24
잉여의 시간- 나희덕  (0) 2019.06.21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김사인  (0) 2019.06.21
동질 - 조은  (0) 2019.06.21

잉여의 시간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

이 시를 읽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서른 다섯,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내게 배달된 그 시간이 떠올라서......

지금 여기에 남아도는 나는, 잃어버린 너를 찾듯이

무언가를 잡으려 계속 부유하고 있는 중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_유희경  (0) 2019.12.22
조용한 일- 김사인  (0) 2019.10.24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이제니>  (0) 2019.10.20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김사인  (0) 2019.06.21
동질 - 조은  (0) 2019.06.21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적은 것만으로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안되겠다면 도리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

독특한 시다. 이런 시는 처음 봤다. 

굵은 글씨체로 적힌 부분은 이성신 시인의 [다리]전문과 [별을 보며] 첫부분을 적어 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를 자신의 시에 삽입하여 새로 시 한 편 지은걸로 하자는 발상이 귀엽다. 

시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보이는 시다. 내게 좋은 시를 지나치지 말고 음미하라는 듯하다.  

그렇다고 너무 쳐다보지 말라고. 그럼 어떻게 봐야 시(본질)를 제대로 보는 걸까. 

나는 아직 시를 모른다. 그래서 해석도 제멋대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_유희경  (0) 2019.12.22
조용한 일- 김사인  (0) 2019.10.24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이제니>  (0) 2019.10.20
잉여의 시간- 나희덕  (0) 2019.06.21
동질 - 조은  (0) 2019.06.21


동질 

                  - 조은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지금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말이꼭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를 생명처럼 잡고 있는 

절박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신도 사람도 믿지 않아

잡을 검불조차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꾸벅꾸벅 졸았다


답장을 쓴다

-시험꼭잘보세요행운을빕니다!


------------------------------------

잘못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받은 청년(?).

자기가 기다리던 사람의 문자가 아니라서 실망했을까. 

답장 메시지를 보고 배시시 웃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의 실수를 눈감아주는 문자 한 통에 긴장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잘못 보냈지만, 자신을 응원해주는 모르는 사람의 답장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된다.

이런 에피소드는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을  헐렁하게 혹은 말랑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잘못된 메시지를 작가는 잘 포착한 것 같다. 

무엇보다 자신이 절박해 보았기에, 보이는 절박함. 작가는 지나칠 수 없었던 거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