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의 시간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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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서른 다섯,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내게 배달된 그 시간이 떠올라서......
지금 여기에 남아도는 나는, 잃어버린 너를 찾듯이
무언가를 잡으려 계속 부유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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