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온기는 있으나 빈 듯했다. 거실에는 TV만 혼자 왕왕거리고 있었고, 주방에는 달그락거리던 소리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털어 개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었다. 방 한쪽에 널려있는 다리미대와 다리미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다림질했어요?”
“네 엄마가 하고 간 거지. 그날 아침에 바쁘게 나갔거든.”
“좀 치우시지.”
집안 살림에는 무심한 아버지다. 청소기를 돌리고, 바싹 말라버린 물걸레를 빨아 방을 닦았다. 이날은 엄마가 자리를 비운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싱크대 위에 냄비가 하나 보였다. 그 속엔 수저, 국자, 주걱이 걸쳐져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김치냉장고 속에 묵처럼 엉긴 곰국을 이 냄비에 덜었을 것이다. 국을 데워 밥을 말아 드시고, 가끔은 냄비에 김치밥국도 끓여 드셨겠지. 다른 식기들은 건들지 않고, 오로지 냄비와 수저, 국자, 주걱만으로 가능한 식사를 했을 것이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냄비가 왠지 짠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엄마가 만들어 둔 반찬이 가득했다. 시금치 무침, 도라지 초무침, 멸치볶음, 장조림, 김치가 투명한 유리 반찬통에 들어있었다. 반찬 뚜껑을 열어보니, 먹은 흔적 없이 정갈하게 담겨있었다.
“아부지 반찬 안 드셨어요?”
“점심과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밖에서 먹을 때도 있었고, 하루에 한두 끼를 집에서 먹으니 별로 손 안 댔다.”
아버지가 멋쩍게 웃으며, 밥은 자신이 해서 다 먹었다고 했다. 보온시간 ‘52시간’이 표시된 전기밥솥을 열어보니, 밥풀이 듬성듬성 붙은 채 누렇게 말라있었다. 15년 전에, 엄마가 새언니의 산후조리를 도와주러가서 한 달간 집을 비웠을 때, 아버지는 전기밥솥의 사용법을 익혔다. 그 후론 항상 밥은 문제없다고 말했었고, 엄마가 집을 비워도 걱정 없다 했다.
친정에 가면, 대체로 온돌방에 등부터 붙였다. 밥 때가 될 무렵, 부엌에서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바글바글 끓어대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커다란 양수냄비 안에서 초록빛 몸을 풀고 있는 나물 냄새, 직접 키운 참깨로 짠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여닫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가만히 누워 친정 냄새를 맡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곤 했다. “밥은 먹고 자라”며 엄마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면, 그제야 어기적대며 몸을 일으켰다. 엄마는 ‘밥 한 끼’에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았다. 한 그릇 맛있게 먹고 나면, 음식에 담긴 곱디고운 마음 입자들이 내 안 어딘가로 스며들어 든든했다. 지금은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내가 주말 동안 친정에 머물며 밥을 챙겼다. 밥상을 들고 들어선 나를 보며 꼬맹이 딸이 말했다.
“엄마가 할머니 같아. 할머니가 움직이던 대로 똑같이 움직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엄마를 따라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내 딸도 조금씩 나를 따라하겠지.
엄마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외출 준비를 했다.
“전화 오면, 서문 오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라.”
엄마한테서 연락 오면 나가도 된다고 말해도, 아버지는 괜찮다며 서둘러 나가셨다. 별로 내색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엄마를 많이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엄마가 집안에 들어서자, 친정집은 다시 친정 같았다. 엄마는 서울에서 있었던 일들과 선물 받은 것들을 뜨끈한 온돌방 한가운데 풀어 놓았다. 아버지는 가만히 엄마의 얘기를 들었고, 선물 받은 장갑도 슬쩍 껴보셨다. 친정집의 공기는 원래대로 꽉 채워졌고, 나는 다시 온돌방 바닥에 붙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엄마가 안 계셨을 때 느꼈던 친정 분위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줬다. 친구들도 자신의 친정 얘기를 꺼냈다. 한 친구는 몇 달 전에 친정아버지가 뇌졸중으로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어,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했다. 좋아하던 외식도 꺼리고, 몸이 힘드니 더 역정을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친정엄마가 무릎 수술을 해서 활기찼던 엄마의 모습이 사라져, 예전처럼 편안하게 뒹굴 수 있는 친정이 아니라고 했다. 자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나약해져 가는 부모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자식을 위해 애쓰며 살아온 부모를 바라볼수록 애틋하기만 하다. 나도 언젠가는 내 딸들의 친정이 될 거다. 난 어떤 친정이 되어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선은 건강해야겠지. 나는 엄마처럼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데 어쩌지.
어린 아이들과 보내는 하루하루는 별걸 하지 않아도 빠르게 지나간다. 어느새 또 밤이다. 청소기를 돌리고, 밥을 먹이고, 아이들을 씻겼다. 잠잘 준비하라고 일러두고 설거지를 했다.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하나는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고, 또 하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하나는 심각했고, 하나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전등 빛 아래에서 책장을 넘기며, 글자 속에 담긴 의미들을 조금씩 씹어 먹는 아이들. 책에 풀어져 있는 이야기를 맛보고, 좋은 것은 계속 집어삼켰다. 나처럼 책 맛을 좋아해서 다행이다. 자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도, 이 시간이면 마주치는 풍경을 깨트리기 싫다. 나도 읽다가 접어둔 책을 가져와 아이들 곁에 슬며시 앉았다. 언제든 편안하게 책을 보며 쉴 수 있는, 책 냄새나는 친정은 어떨까. 그저 상상만으로 좋다.
- 현대수필 봄호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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