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정은아

배를 움켜쥐고 응급실에 도착했다. 진료 접수 후 간이침대에 누웠다. 간호사는 내게 이것저것 물었고, 몇 가지 검사가 필요하다며 잠시 대기하라고 했다. 병원에 오면 아픈 사람이 천지다. 일요일 오후 4시. 이곳에 모인 이는 어딘가 아프다.

꼬마가 침대에 누워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기울인 여자가 아이를 토닥였다. 한 발짝 옆에 선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주변을 둘러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링거를 맞는 할머니 옆에 중년 여자가 큰소리로 호통치듯이 통화를 했다. 덩치 큰 남자에게 몸을 기댄 채 응급실로 들어서는 자그마한 여자도 있었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아저씨는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대며 내 앞을 지나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의사가 슬리퍼를 끌고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피검사, CT, 초음파 검사 등의 결과가 나왔단다. 소위 맹장이라고 부르는 충수에 염증이 생겼단다. 염증 수치가 높고 충수 부위가 많이 부어 있어서 수술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보호자는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내가 아이들의 보호자인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내게도 보호자가 있어야 했나. 내 보호자는 누구지. 결혼 전에는 부모님, 결혼 후엔 남편. 보통 그러하다. 배가 더 아파지는 것 같았다. 머뭇대고 있으니, 의사가 다시 물었다.
“보호자 같이 안 왔어요?”
의사는 내게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보호자가 빨리 와야 오늘 내로 수술받을 수 있어요.”
내가 핸드폰을 꺼내 들자, 의사의 슬리퍼 소리는 멀어졌다.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놀라지 마세요. 배가 아파서 응급실 왔는데 맹장염이래요. 수술동의서에 사인해야 한대요. 아버지, XX병원에 와주세요.”
“애들은? 같이 있냐?”
“집에 있어요. 엄마한테는 애들 좀 부탁해요.”
“알았다. 곧 가마.”

산통에 버금갈 복통이 이어졌다. 고통이 잠시 잦아들 때면 주변이 또렷이 보였다. 그저 서로를 지켜봐 주는 흔하디흔한 사람들의 모습. 별것 아닌데 별것이 되는 순간. 육체의 통증이 내면의 가장 취약한 곳을 찾아내 찔러댔다. 굳이 찾아서 드러낼 필요가 없는데도 쉽게 들키는 허점을 지닌 곳.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마음이, 몸이 아프면 왜 이리 물러 터지는가 싶다. 사방이 트인 간이침대가 불편했다.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니 커튼을 칠 수 있었다. 외부의 시선과 밖으로 향하는 나의 시선을 다 차단하듯이 커튼을 쳤다. 오직 ‘나’만 남은 공간.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을 자유로움. 다른 면으로 보면 고립인가. 사람은 원래 혼자야. 괜찮다. 괜찮다. 이런 상황을 또 만들지는 말자. 아프지 말자. 나는 아프지 말자. 직육면체 안에 나를 가두고, 오지 못할 보호자와 내게 오고 있을 보호자를 기다렸다. “괜찮으세요?” 커튼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네.” “보호자는 오셨어요?” “오는 중이에요.” 커튼을 반쯤 걷었다.

나를 돌봐줄 보호자들이 응급실을 두리번거렸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그들에서 팔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뒤를 따라서 할머니 손을 잡고 종종대며 걸어왔다. 엄마는 딸이 수술할 동안 집에서 기다리는 게 더 힘들다고 판단했나 보다. 사위를 사고로 잃고 난 후,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걱정으로 출렁거리곤 했다. 애써 담담한 척하셔도 찌푸려진 미간과 흔들리는 눈동자는 감출 수 없었다. 아이들은 밝다. 그래서 좋다. 수술하면 괜찮다고 하니,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할아버지를 졸랐다. 아버지는 수술동의서에 사인하고 아이들과 편의점에 갔다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제 뭘 해도 문제없다. 난 혼자가 아니다. 스스로를 가둔 내가, 나를 해방했다. 아이들이 사탕을 빨며 간이침대에 붙어 서서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나를 걱정하는 얼굴과 그 속에 담긴 마음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서서히 침대가 움직였다.
“수술 잘하고 와라.”
목소리로 전해지는 격려에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푸른빛 조명 아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수술실은 덜덜거릴 정도로 추웠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기계음 소리도 계속 들려왔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가벼운 농담을 섞어가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긴장을 풀기 위해서일까. 곧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마취약 들어갑니다.”
어느 순간 의식이 흐릿해졌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나이 든 보호자들과 어린 보호자들, 그리고 올 수 없는 보호자를 떠올렸다.
‘이제 곧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 마요.’

좋은수필(7월호)에 실렸던 글이 The 수필에 실렸다. 감사한 일이다. 책속에서 모인 60인의 글과 삶을 들여다보며 연말을 보낼 것 같다.
황당하고 무서웠던 계엄에 이어, 심장 졸이게 했던 탄핵가결을 지켜봤다. 불안했던 마음이 여전히 가라앉질 않는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답답하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국민이 우선인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내년엔 안정된 새로운 세상이길 바래본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수필을 읽으며, 마음만은 뜨끈해지고 싶다.


<더수필을 보니,  더 수필을 쓰도록 애써야겠다>

많이 생각하는 날>>>
                                                            정은아

그날은 비가 왔다. 장마철이라 어두침침하고 습했다. 잠든 아이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던 빗소리. 안과 밖이 극명한 대비를 이뤄도, 내겐 나른한 오후일 뿐이었다. 거실 매트 위에 누워 아이의 분유를 주문하려고 온라인 쇼핑몰을 두리번댔다. 고요를 깨트리며 전화가 울렸다. 전화로 들려온 말이 비현실적이라 거짓 같았다. 어찌할지 몰라서, 거실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말도 안 돼’만 중얼거렸다. 심장박동은 제멋대로 날뛰었고, 비바람은 끊이지 않고 몰아쳤다. 그때 나는 ‘아내’의 역할을 잃었고, 아이들의 유일무이한 부모가 되었다. 매년 그날이 다가오면, 태엽을 거꾸로 감듯이 그날 오후 4시로 되돌아갔다. 그러면, 빈 가슴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달력에 새겨놓지 않아도, 몸이 그날을 기억하는지 몸살을 앓는다.



나는 성격상 특정한 날을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었다. 남편과 사별 후에는 어떤 기념일도, 어떤 명절도 무심하게 지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어떤 날의 기억은 상처를 헤집어 놓는다. 결혼 후 나의 첫 생일날, 남편은 장미꽃 한 송이를 내게 내밀었다.
“은아야, 장미꽃 한 송이라 미안해. 매년 생일마다 한 송이씩 늘어날 거야. 100송이가 될 때까지 잘 살자.”
약속은 고작 5송이에서 깨졌다. 만약 사고가 없었다면, 장미꽃은 계속 늘어났을까. 누군가를 챙길 일도 챙김을 받을 일도 없는 사람은, 반복되는 평일보다 이름이 붙여진 특정한 날이 더 외로운 법이다. 요즘은 생일날이 돌아오면, ‘삶이 1년 더 갱신되었습니다’라고 알려주는 느낌이 든다. 축하의 의미도 마치 생존의 기쁨을 나누려는 작은 의식 같다. 그래서 죽은 사람은 생일을 잘 챙기지 않는 것일까. 갱신될 삶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죽어야만 챙기는 날이 있다. 옛날부터 ‘제삿날’, ‘기일’, ‘회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고인이 된 사람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챙겼다. 자기 자신은 챙길 수 없으니, 남겨진 이들에게 의무처럼 주어지는 날이다. 365일 중 하루. 그래도 남겨진 사람에게는 다른 날의 24시간보다 가슴이 뻐근하다. 남편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사고사라서 뇌 어딘가에 선명한 흔적을 남긴 걸까.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아픔을 되새김하게 만든다. 나는 남편의 ‘제삿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편과 좋았던 날들도 많은데, 굳이 사고가 난 날을 고통스럽게 다시 생각해야만 할까. 남편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 날 이후로, 기일이 돌아올 때면 하루가 빨리 흘러가길 염원했다.

처음 몇 년간, ‘제사’라는 이름으로 의식을 올렸다. 어머니는 사위를 위해 나물이며 떡, 생선 등의 제사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오셨고, 아버지는 붓글씨로 제문을 써서 오셨다. 부모님에게 제사는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돌아가신 조상에게 예를 갖추어 대접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가정과 후손이 평안해질 수 있는 전통 의식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위에게 지내는 제사는, 딸과 손녀를 잘 돌봐주길 바라는 마음과 사위를 향한 안타까움을 전하는 마음이다. 어머니는, 제사가 많은 집안에서 평생을 살아왔으면서도 사위 제사까지 챙기려고 했다. 제삿날 며칠 전부터 제사장을 보고, 새벽부터 음식 재료를 다듬고 삶았다.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아버지는 홍동백서, 조율이시를 따져가며 상을 차렸고 제례에 맞춰 의식을 치렀다. 두 분이 애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제사의 여정이 무거운 짐처럼 여겨졌다. 그냥 엎드려 울고만 싶었다. 기일을 다르게 보낼 수는 없을까.

또다시 그날이 돌아왔다.
“얘들아, 오늘은 아빠를 많이 생각하는 날이야.”
A4 한 장을 꺼내 우리만의 제문을 만들었다. 우선, 백지를 3등분으로 접었다. 백지 가운데 부분은 내 자리다. 남편에게 쓰고 싶은 말을 차분히 적었다. 롤링 페이퍼처럼 아이들에게 종이를 돌렸다. 종이 왼쪽엔 큰아이가 아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오른쪽엔 작은 아이가 적고 싶은 것을 썼다. 아이들은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도, 뭔가를 적었다. 편지 같은 제문이 완성됐다. 음식은 남편이 좋아했거나 우리가 저녁으로 먹을 음식들을 주로 차려 놓았다. 밥, 소고기뭇국, 치킨, 수박, 바나나. 때로는 보쌈, 떡, 두부 부침, 호박전, 피자…. 그때그때 다르다. 잊지 않고 꼭 챙기는 것은, 그가 좋아하던 캔맥주 한 캔. 핸드폰에 담긴 남편의 사진을 찾아 상 위에 세우고, 간단하게 절을 올렸다. 나는 남편을, 아이들은 아빠를 생각했다. 원래 식성이 좋았던 사람이라, 맛있게 잘 먹고 있을 거다. 편지를 읽고, 왼쪽 뺨에 보조개를 지으며 웃고 있지 않을까. 햇빛이 유난히 쨍한 날, ‘많이 생각하는 날’은 잔잔하게 지나갔다.



ㅡ풀지 못하는 자물쇠
 

정은아

 
무의식이 말했다. 이제 끝이라고.
수많은 흰색 운동화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신발을 무작위로 마구 던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나는 신발 한 짝을 신은 채로, 나머지 한 짝을 찾고 있었다. 내 운동화는 흰 끈으로 매어져 있고, 다른 것들은 끈 없이 밋밋했다. 한쪽 다리로 휘청대며 끈이 있는 신발을 찾으려고 애썼다.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대는데, 버스가 경적을 울렸다. 조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있는 신발 중 한 짝을 신었다. 긴 바지 아래 감춰진 짝짝이 운동화. 똑같은 흰색이라 얼핏 보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탔어도 얼떨결에 신고 온 신발 한 짝과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이 신경 쓰였다.
꿈이었다. 꿈을 맹신하진 않지만, 그 꿈은 유난히 선명했다. 스마트폰으로 꿈 해몽을 검색했다. 한쪽 신발을 잃는 꿈은 반려자의 죽음을 의미하고, 신발 한 짝을 다른 신발로 바꿔 신는 꿈은 새로운 사람이 생기거나, 다른 직업이나 일을 가지게 되는 것이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미 잃어버린 반려자를 왜 다시 잃는다는 건가. 그를 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내 무의식까지 파고 들어간 걸까.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미안했다. 이런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서, 갑자기 내게로 밀려오는 걸까.
 
얼마 전, 시아버지의 부고를 문자로 받았다. 그가 없는 시가媤家는 끈이 끊어진 곳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람의 도리나 규범을 따져보자면, 당장 달려가 며느리 역할을 하고 슬픔을 같이 나눠야 한다. 하지만, 나는 시집 식구들과 연락이 끊긴 지 몇 해가 지났다. 모든 서류가 정리된 후에는, 명절에만 연락이 오가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과거의 장소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남편만 빠진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까. 어떤 사건은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에게 그랬나 보다. 육체적 외상과 달리 정신적 외상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대처하기가 어렵다. 나만 알고 느끼는 것이라 고립감마저 느껴진다. 회복이 되었나 싶다가도 자잘한 기억이 떠오르면, 한순간에 무기력해진다. 순간순간 무너지고, 살아가기 위해 다시 일어난다.
큰형님에게 다음날 가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기차표를 예약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밤새 뒤척거렸다. 춥지도 않은 따신 날에, 온몸이 춥고 욱신거렸다. 가슴에 통증도 느껴졌다. 카디건을 입고 웅크리고 누워도 여전히 아팠다. 힘들어하다 잠깐 잠이 들었다. 새벽 4시 37분. 또 잠이 깼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내 몸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불쑥 나와 버렸다. 멈출 수 없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아, 가슴을 두드렸다. 울면서도 생각했다. 도대체 이 울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이리도 슬픈 걸까. 사무친다는 말, 나는 싫어한다. 하지만 난 지금 사무쳤나 보다. 그 일이, 그 사람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놓아주질 않는지도 모른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울다가 선명해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물을 닦았다. 차가운 물로 퉁퉁 부은 눈을 눌렀다. 다시 나는 원래의 ‘고요한 나’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 앞에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강인한 내가 필요하니까. 실컷 쏟아낸 후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구로역을 지나갔다. 연애할 때 자주 머물던 역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둘이 같은 곳을 바라보곤 했다.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있던 곳. 저 지점 어딘가에 무언가 환영幻影처럼 떠올랐다. 현실에는 그 남자도, 그 여자도 없다. 우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닮은 사람이라도 찾듯이 둘러봤다. 찾을 수 없는 우리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역에서 엄마랑 아빠가 많이 만났어.” 그 말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구로역 승강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우리는 잊힌 과거로 답사를 온 듯했다.
부천에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부천은 남편의 형제들이 사는 곳이라 언제나 그와 함께 오곤 했다.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초췌해진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형님이 먼 길 와줘서 고맙다고 내 손을 꼭 쥐었다. 시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어찌 된 일인지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새벽에 다 쏟아부어 버려서 그런가. 난감했다. 남편의 장례식 때, 시아버지가 나를 꾸짖던 기억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아들 앞세운 속상한 마음에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에 박혀 쓰렸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온 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부디 거기서는 평안하시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장례식장을 나와, 인천가족공원에 갔다. 남편이 있는 주소는 만월당 ‘2-8XX번’이다. 단단한 유리로 막힌 아주 작고 네모난 공간이다. 그 안에는 봉안함과 액자가 놓여있다. 봉안함 안에는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된 그가 있고, 액자 속에는 우리 가족이 환하게 웃고 있다. 맨 아래쪽에 자리한 그를 보려고, 주저앉았다. 여전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의 나와 달랐다. 그곳은 죽은 자들만 모여있어 조용했다. 침묵한 아빠와 마주 앉은 아이들은 어색한지 자꾸만 나를 돌아봤다. 다 같이 사진을 찍고, 잘 지내라고 말하고는 뒤돌아섰다.
서울역에서 배를 채웠다. 헛헛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더 채워야만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근처에 남산이 있다고 말해주니 가고 싶다고 했다. 20대 때, 서울역 근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면, 그가 나를 기다렸다. 그와 같이 걷던 거리를, 아이들과 걸었다. ‘서울로’라는 구름다리가 보였다. 서울이 변했고, 나도 변했다. 오랜만에 높은 구두를 신었더니, 발이 아팠다. 공허를 경감시켜줄 아픔이, 오히려 반가웠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천천히 남산을 둘러봤다. 수천 개도 넘는 사랑의 자물쇠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저 수많은 사랑의 맹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이는 자물쇠를 풀고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을까. 잊힌 자물쇠를 풀어줄 열쇠는 영원히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풀지 못하는 자물쇠는 철조망 한 귀퉁이에 매달린 채, 기약도 없이 갇혔다. 자물쇠는 굳게 잠긴 채로 녹슬고, 낡아간다. 둘이 같이 바라보던 곳에서, 아이들과 같이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다. 발은 더 아팠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적 공허는, 남산 계단에서 비실거리는 육체 때문에 시들해졌다. 남산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보이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눈빛으로 반짝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보챘다. “제발 그만 보고 가자.”
 
며칠 후, 흰 운동화 꿈을 꿨다. 친구에게 꿈 얘기를 했더니, 시간이 흘렀으니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했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도 없고, 너도 너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좀 자유로워지라고도 했다. 고마운 말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를 떨쳐낼 수 없다. 이렇게 글을 끝내려다 다시 생각했다. 삶의 어떤 것이든 해석이 중요하다. 운동화 꿈이 글 쓰는 삶의 시작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글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지만, 앞으로는 글이 내 삶의 일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무의식이 알려준 건 아닐까. 풀지 못할 무언가에 매여 있는 삶이라도,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_2018년 초여름 밤에

 

내 방에 누우면 봉창이 보였다. 손이 닿지 않는 천장 가까이에, 스케치북 크기의 불투명 유리창. 여러 겹의 비닐이 덧대어져 바람도 빛도 거의 들어올 수 없었다. 봉창은 통할 수 없는 창이었다. 그 아래는 어둠에 먹히고, 불안으로 채워진 자리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고,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때론 봉창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가는 사람도 있었다. 봉창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 실체를 볼 수 없기에, 내겐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뜀박질 소리가 가까워지다 봉창 앞에서 멈추면, 뭔가가 봉창을 뚫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럴 때는 언니를 쳐다봤다. 붙박이처럼 책상에 붙어서 무언가를 적고 있는, 뒷모습은 의연(依然)했다. 스탠드 불빛 아래에 펼쳐진 언니의 세계를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다른 방으로 갔다.

오빠 방에도 창이 있었다. 창문을 열면 계단과 옆집 담벼락이 보였다. 담벼락 아래쪽과 계단 사이에는 자그마한 잡초들이 자랐다. 언제나 거기에서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커갔다. 풍족하지 않아도, 자기가 발붙인 곳에서 서서히 몸뚱이를 키우고 꽃을 피웠다. 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바람이 부는 대로 일렁거렸다. 가끔 방향을 알 수 없는 위쪽 어딘가에서 쓰레기가 날아와도, 잡초는 군말 없이 제 삶을 살았다. 난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창이 좋았다.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작아도, 바깥과 통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오빠 방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창이기도 했다. ‘HAM’이라는 아마추어 무선통신기기와 컴퓨터는 별세상이었다. 오빠가 무선기기를 켜면 ‘치직치직’ 소리가 났고, 암호를 대듯이 영어와 숫자가 섞인 닉네임을 서로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야밤에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할머니는 간첩이 사는 줄 알겠다며 오빠를 야단치곤 했다. 나는 ‘치직’대며 누군가를 찾아가는 신호음이 좋았다. 컴퓨터도 오빠의 애장품 중 하나였는데, 오빠는 컴퓨터 본체의 배를 갈라 들여다보곤 했다. 땜질한 판들과 편편한 줄들이 어수선하게 꽂혀 있었다. 오빠는 틈만 나면 부속품을 빼고 꽂으며 컴퓨터 뱃속을 탐험하고, 모니터의 까만 화면에 글자를 부지런히 입력하기도 했다. 모뎀의 연결 소리는 외계 세상과의 교신 같았다. 타닥타닥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통신으로 연결된 상대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빠가 없을 때, 나도 슬쩍 검은 창을 두드렸지만, 나에겐 열리지 않았다. 나는 미숙했다. 아직 창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커갈수록 창이 조금씩 열렸고, 나의 꿈도 조금씩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창이 생겼다. 오빠가 공사판에서 땀 흘려 일해 마련했다. 나는 오빠 방에 몰래 들어가 새로 생긴 창을 열곤 했다. 빳빳한 종이 케이스에서 까만 원반 하나를 꺼내, 블록을 끼우듯 은색 기둥에 원반 구멍을 맞춰 끼웠다. 나이테처럼 새겨진 동심원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숨을 죽이고 기다란 막대를 들어 올린 후, 원하는 포인트에 살짝 내려놓았다. 음악이 물결치는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면, ‘지직’ 신호가 왔다.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 The Beatles 'Hey Jude' 중에서

바늘이 원반 위의 홈을 따라 돌았다. 내 마음도 서서히 블랙홀로 빠져들 듯이,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케니지의 ‘Going home’을 들을 때면, 햇살이 눈부시게 스며들던 고향집 대청마루에서 엄마가 나를 반겼다.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를 들으면 야자수로 둘러싸인 이국적인 호텔 창을 활짝 열었다. 사이먼&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를 들으면, 내게 속삭이듯 다가오는 목소리로 마음을 다독여줬고, 아바의 Dancing Queen을 들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꿈꿀 내가 필요했다.

스마트폰으로 조지 윈스턴의 ‘December’ 음반을 찾았다. 재생창이 열리고, 미로처럼 꼬인 기억이 음악에 맞춰 풀어진다. 피아노 선율 사이 사이에, 내가 못처럼 군데군데 박혀 있다. 15살의 내가, 중년이 되어버린 나를 바라본다. 자잘한 주름, 살면서 겪은 생채기 몇 군데, 점점 느슨해지는 생각, 갈비뼈 사이를 파고드는 공허. 나는 생이 흐르는 대로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고 있다. 그동안 어떤 일은 꿈처럼 이루어졌고, 어떤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했다. 한 사람을 만나 미련하게 사랑했고 쓰라리게 이별했다. 이제 난 무슨 꿈을 꿔야 하는 걸까. 여전히 불안을 곁에 둔 채로, 가끔 작은 창을 연다. 항상 열 수 있어도, 마음은 열기 힘든 창 앞에서 머뭇거린다. 어렵사리 게워낸 글이 적힌 창에, 다음 걸음을 재촉하는 커서가 쉴새 없이 깜빡인다.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씩 걸어가.’ 나는 작은 창 안에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오늘과 내일과 어제를 천천히 밀고 나아간다.


* 수필은,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작은 창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