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7월호)에 실렸던 글이 The 수필에 실렸다. 감사한 일이다. 책속에서 모인 60인의 글과 삶을 들여다보며 연말을 보낼 것 같다.
황당하고 무서웠던 계엄에 이어, 심장 졸이게 했던 탄핵가결을 지켜봤다. 불안했던 마음이 여전히 가라앉질 않는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답답하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국민이 우선인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내년엔 안정된 새로운 세상이길 바래본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수필을 읽으며, 마음만은 뜨끈해지고 싶다.


<더수필을 보니,  더 수필을 쓰도록 애써야겠다>

많이 생각하는 날>>>
                                                            정은아

그날은 비가 왔다. 장마철이라 어두침침하고 습했다. 잠든 아이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던 빗소리. 안과 밖이 극명한 대비를 이뤄도, 내겐 나른한 오후일 뿐이었다. 거실 매트 위에 누워 아이의 분유를 주문하려고 온라인 쇼핑몰을 두리번댔다. 고요를 깨트리며 전화가 울렸다. 전화로 들려온 말이 비현실적이라 거짓 같았다. 어찌할지 몰라서, 거실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말도 안 돼’만 중얼거렸다. 심장박동은 제멋대로 날뛰었고, 비바람은 끊이지 않고 몰아쳤다. 그때 나는 ‘아내’의 역할을 잃었고, 아이들의 유일무이한 부모가 되었다. 매년 그날이 다가오면, 태엽을 거꾸로 감듯이 그날 오후 4시로 되돌아갔다. 그러면, 빈 가슴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달력에 새겨놓지 않아도, 몸이 그날을 기억하는지 몸살을 앓는다.



나는 성격상 특정한 날을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었다. 남편과 사별 후에는 어떤 기념일도, 어떤 명절도 무심하게 지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어떤 날의 기억은 상처를 헤집어 놓는다. 결혼 후 나의 첫 생일날, 남편은 장미꽃 한 송이를 내게 내밀었다.
“은아야, 장미꽃 한 송이라 미안해. 매년 생일마다 한 송이씩 늘어날 거야. 100송이가 될 때까지 잘 살자.”
약속은 고작 5송이에서 깨졌다. 만약 사고가 없었다면, 장미꽃은 계속 늘어났을까. 누군가를 챙길 일도 챙김을 받을 일도 없는 사람은, 반복되는 평일보다 이름이 붙여진 특정한 날이 더 외로운 법이다. 요즘은 생일날이 돌아오면, ‘삶이 1년 더 갱신되었습니다’라고 알려주는 느낌이 든다. 축하의 의미도 마치 생존의 기쁨을 나누려는 작은 의식 같다. 그래서 죽은 사람은 생일을 잘 챙기지 않는 것일까. 갱신될 삶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죽어야만 챙기는 날이 있다. 옛날부터 ‘제삿날’, ‘기일’, ‘회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고인이 된 사람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챙겼다. 자기 자신은 챙길 수 없으니, 남겨진 이들에게 의무처럼 주어지는 날이다. 365일 중 하루. 그래도 남겨진 사람에게는 다른 날의 24시간보다 가슴이 뻐근하다. 남편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사고사라서 뇌 어딘가에 선명한 흔적을 남긴 걸까.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아픔을 되새김하게 만든다. 나는 남편의 ‘제삿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편과 좋았던 날들도 많은데, 굳이 사고가 난 날을 고통스럽게 다시 생각해야만 할까. 남편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 날 이후로, 기일이 돌아올 때면 하루가 빨리 흘러가길 염원했다.

처음 몇 년간, ‘제사’라는 이름으로 의식을 올렸다. 어머니는 사위를 위해 나물이며 떡, 생선 등의 제사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오셨고, 아버지는 붓글씨로 제문을 써서 오셨다. 부모님에게 제사는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돌아가신 조상에게 예를 갖추어 대접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가정과 후손이 평안해질 수 있는 전통 의식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위에게 지내는 제사는, 딸과 손녀를 잘 돌봐주길 바라는 마음과 사위를 향한 안타까움을 전하는 마음이다. 어머니는, 제사가 많은 집안에서 평생을 살아왔으면서도 사위 제사까지 챙기려고 했다. 제삿날 며칠 전부터 제사장을 보고, 새벽부터 음식 재료를 다듬고 삶았다.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아버지는 홍동백서, 조율이시를 따져가며 상을 차렸고 제례에 맞춰 의식을 치렀다. 두 분이 애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제사의 여정이 무거운 짐처럼 여겨졌다. 그냥 엎드려 울고만 싶었다. 기일을 다르게 보낼 수는 없을까.

또다시 그날이 돌아왔다.
“얘들아, 오늘은 아빠를 많이 생각하는 날이야.”
A4 한 장을 꺼내 우리만의 제문을 만들었다. 우선, 백지를 3등분으로 접었다. 백지 가운데 부분은 내 자리다. 남편에게 쓰고 싶은 말을 차분히 적었다. 롤링 페이퍼처럼 아이들에게 종이를 돌렸다. 종이 왼쪽엔 큰아이가 아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오른쪽엔 작은 아이가 적고 싶은 것을 썼다. 아이들은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도, 뭔가를 적었다. 편지 같은 제문이 완성됐다. 음식은 남편이 좋아했거나 우리가 저녁으로 먹을 음식들을 주로 차려 놓았다. 밥, 소고기뭇국, 치킨, 수박, 바나나. 때로는 보쌈, 떡, 두부 부침, 호박전, 피자…. 그때그때 다르다. 잊지 않고 꼭 챙기는 것은, 그가 좋아하던 캔맥주 한 캔. 핸드폰에 담긴 남편의 사진을 찾아 상 위에 세우고, 간단하게 절을 올렸다. 나는 남편을, 아이들은 아빠를 생각했다. 원래 식성이 좋았던 사람이라, 맛있게 잘 먹고 있을 거다. 편지를 읽고, 왼쪽 뺨에 보조개를 지으며 웃고 있지 않을까. 햇빛이 유난히 쨍한 날, ‘많이 생각하는 날’은 잔잔하게 지나갔다.



ㅡ풀지 못하는 자물쇠
 

정은아

 
무의식이 말했다. 이제 끝이라고.
수많은 흰색 운동화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신발을 무작위로 마구 던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나는 신발 한 짝을 신은 채로, 나머지 한 짝을 찾고 있었다. 내 운동화는 흰 끈으로 매어져 있고, 다른 것들은 끈 없이 밋밋했다. 한쪽 다리로 휘청대며 끈이 있는 신발을 찾으려고 애썼다.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대는데, 버스가 경적을 울렸다. 조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있는 신발 중 한 짝을 신었다. 긴 바지 아래 감춰진 짝짝이 운동화. 똑같은 흰색이라 얼핏 보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탔어도 얼떨결에 신고 온 신발 한 짝과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이 신경 쓰였다.
꿈이었다. 꿈을 맹신하진 않지만, 그 꿈은 유난히 선명했다. 스마트폰으로 꿈 해몽을 검색했다. 한쪽 신발을 잃는 꿈은 반려자의 죽음을 의미하고, 신발 한 짝을 다른 신발로 바꿔 신는 꿈은 새로운 사람이 생기거나, 다른 직업이나 일을 가지게 되는 것이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미 잃어버린 반려자를 왜 다시 잃는다는 건가. 그를 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내 무의식까지 파고 들어간 걸까.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미안했다. 이런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서, 갑자기 내게로 밀려오는 걸까.
 
얼마 전, 시아버지의 부고를 문자로 받았다. 그가 없는 시가媤家는 끈이 끊어진 곳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람의 도리나 규범을 따져보자면, 당장 달려가 며느리 역할을 하고 슬픔을 같이 나눠야 한다. 하지만, 나는 시집 식구들과 연락이 끊긴 지 몇 해가 지났다. 모든 서류가 정리된 후에는, 명절에만 연락이 오가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과거의 장소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남편만 빠진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까. 어떤 사건은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에게 그랬나 보다. 육체적 외상과 달리 정신적 외상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대처하기가 어렵다. 나만 알고 느끼는 것이라 고립감마저 느껴진다. 회복이 되었나 싶다가도 자잘한 기억이 떠오르면, 한순간에 무기력해진다. 순간순간 무너지고, 살아가기 위해 다시 일어난다.
큰형님에게 다음날 가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기차표를 예약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밤새 뒤척거렸다. 춥지도 않은 따신 날에, 온몸이 춥고 욱신거렸다. 가슴에 통증도 느껴졌다. 카디건을 입고 웅크리고 누워도 여전히 아팠다. 힘들어하다 잠깐 잠이 들었다. 새벽 4시 37분. 또 잠이 깼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내 몸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불쑥 나와 버렸다. 멈출 수 없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아, 가슴을 두드렸다. 울면서도 생각했다. 도대체 이 울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이리도 슬픈 걸까. 사무친다는 말, 나는 싫어한다. 하지만 난 지금 사무쳤나 보다. 그 일이, 그 사람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놓아주질 않는지도 모른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울다가 선명해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물을 닦았다. 차가운 물로 퉁퉁 부은 눈을 눌렀다. 다시 나는 원래의 ‘고요한 나’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 앞에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강인한 내가 필요하니까. 실컷 쏟아낸 후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구로역을 지나갔다. 연애할 때 자주 머물던 역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둘이 같은 곳을 바라보곤 했다.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있던 곳. 저 지점 어딘가에 무언가 환영幻影처럼 떠올랐다. 현실에는 그 남자도, 그 여자도 없다. 우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닮은 사람이라도 찾듯이 둘러봤다. 찾을 수 없는 우리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역에서 엄마랑 아빠가 많이 만났어.” 그 말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구로역 승강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우리는 잊힌 과거로 답사를 온 듯했다.
부천에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부천은 남편의 형제들이 사는 곳이라 언제나 그와 함께 오곤 했다.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초췌해진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형님이 먼 길 와줘서 고맙다고 내 손을 꼭 쥐었다. 시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어찌 된 일인지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새벽에 다 쏟아부어 버려서 그런가. 난감했다. 남편의 장례식 때, 시아버지가 나를 꾸짖던 기억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아들 앞세운 속상한 마음에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에 박혀 쓰렸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온 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부디 거기서는 평안하시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장례식장을 나와, 인천가족공원에 갔다. 남편이 있는 주소는 만월당 ‘2-8XX번’이다. 단단한 유리로 막힌 아주 작고 네모난 공간이다. 그 안에는 봉안함과 액자가 놓여있다. 봉안함 안에는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된 그가 있고, 액자 속에는 우리 가족이 환하게 웃고 있다. 맨 아래쪽에 자리한 그를 보려고, 주저앉았다. 여전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의 나와 달랐다. 그곳은 죽은 자들만 모여있어 조용했다. 침묵한 아빠와 마주 앉은 아이들은 어색한지 자꾸만 나를 돌아봤다. 다 같이 사진을 찍고, 잘 지내라고 말하고는 뒤돌아섰다.
서울역에서 배를 채웠다. 헛헛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더 채워야만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근처에 남산이 있다고 말해주니 가고 싶다고 했다. 20대 때, 서울역 근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면, 그가 나를 기다렸다. 그와 같이 걷던 거리를, 아이들과 걸었다. ‘서울로’라는 구름다리가 보였다. 서울이 변했고, 나도 변했다. 오랜만에 높은 구두를 신었더니, 발이 아팠다. 공허를 경감시켜줄 아픔이, 오히려 반가웠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천천히 남산을 둘러봤다. 수천 개도 넘는 사랑의 자물쇠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저 수많은 사랑의 맹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이는 자물쇠를 풀고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을까. 잊힌 자물쇠를 풀어줄 열쇠는 영원히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풀지 못하는 자물쇠는 철조망 한 귀퉁이에 매달린 채, 기약도 없이 갇혔다. 자물쇠는 굳게 잠긴 채로 녹슬고, 낡아간다. 둘이 같이 바라보던 곳에서, 아이들과 같이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다. 발은 더 아팠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적 공허는, 남산 계단에서 비실거리는 육체 때문에 시들해졌다. 남산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보이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눈빛으로 반짝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보챘다. “제발 그만 보고 가자.”
 
며칠 후, 흰 운동화 꿈을 꿨다. 친구에게 꿈 얘기를 했더니, 시간이 흘렀으니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했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도 없고, 너도 너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좀 자유로워지라고도 했다. 고마운 말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를 떨쳐낼 수 없다. 이렇게 글을 끝내려다 다시 생각했다. 삶의 어떤 것이든 해석이 중요하다. 운동화 꿈이 글 쓰는 삶의 시작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글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지만, 앞으로는 글이 내 삶의 일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무의식이 알려준 건 아닐까. 풀지 못할 무언가에 매여 있는 삶이라도,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_2018년 초여름 밤에

 

내 방에 누우면 봉창이 보였다. 손이 닿지 않는 천장 가까이에, 스케치북 크기의 불투명 유리창. 여러 겹의 비닐이 덧대어져 바람도 빛도 거의 들어올 수 없었다. 봉창은 통할 수 없는 창이었다. 그 아래는 어둠에 먹히고, 불안으로 채워진 자리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고,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때론 봉창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가는 사람도 있었다. 봉창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 실체를 볼 수 없기에, 내겐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뜀박질 소리가 가까워지다 봉창 앞에서 멈추면, 뭔가가 봉창을 뚫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럴 때는 언니를 쳐다봤다. 붙박이처럼 책상에 붙어서 무언가를 적고 있는, 뒷모습은 의연(依然)했다. 스탠드 불빛 아래에 펼쳐진 언니의 세계를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다른 방으로 갔다.

오빠 방에도 창이 있었다. 창문을 열면 계단과 옆집 담벼락이 보였다. 담벼락 아래쪽과 계단 사이에는 자그마한 잡초들이 자랐다. 언제나 거기에서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커갔다. 풍족하지 않아도, 자기가 발붙인 곳에서 서서히 몸뚱이를 키우고 꽃을 피웠다. 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바람이 부는 대로 일렁거렸다. 가끔 방향을 알 수 없는 위쪽 어딘가에서 쓰레기가 날아와도, 잡초는 군말 없이 제 삶을 살았다. 난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창이 좋았다.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작아도, 바깥과 통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오빠 방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창이기도 했다. ‘HAM’이라는 아마추어 무선통신기기와 컴퓨터는 별세상이었다. 오빠가 무선기기를 켜면 ‘치직치직’ 소리가 났고, 암호를 대듯이 영어와 숫자가 섞인 닉네임을 서로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야밤에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할머니는 간첩이 사는 줄 알겠다며 오빠를 야단치곤 했다. 나는 ‘치직’대며 누군가를 찾아가는 신호음이 좋았다. 컴퓨터도 오빠의 애장품 중 하나였는데, 오빠는 컴퓨터 본체의 배를 갈라 들여다보곤 했다. 땜질한 판들과 편편한 줄들이 어수선하게 꽂혀 있었다. 오빠는 틈만 나면 부속품을 빼고 꽂으며 컴퓨터 뱃속을 탐험하고, 모니터의 까만 화면에 글자를 부지런히 입력하기도 했다. 모뎀의 연결 소리는 외계 세상과의 교신 같았다. 타닥타닥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통신으로 연결된 상대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빠가 없을 때, 나도 슬쩍 검은 창을 두드렸지만, 나에겐 열리지 않았다. 나는 미숙했다. 아직 창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커갈수록 창이 조금씩 열렸고, 나의 꿈도 조금씩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창이 생겼다. 오빠가 공사판에서 땀 흘려 일해 마련했다. 나는 오빠 방에 몰래 들어가 새로 생긴 창을 열곤 했다. 빳빳한 종이 케이스에서 까만 원반 하나를 꺼내, 블록을 끼우듯 은색 기둥에 원반 구멍을 맞춰 끼웠다. 나이테처럼 새겨진 동심원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숨을 죽이고 기다란 막대를 들어 올린 후, 원하는 포인트에 살짝 내려놓았다. 음악이 물결치는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면, ‘지직’ 신호가 왔다.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 The Beatles 'Hey Jude' 중에서

바늘이 원반 위의 홈을 따라 돌았다. 내 마음도 서서히 블랙홀로 빠져들 듯이,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케니지의 ‘Going home’을 들을 때면, 햇살이 눈부시게 스며들던 고향집 대청마루에서 엄마가 나를 반겼다.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를 들으면 야자수로 둘러싸인 이국적인 호텔 창을 활짝 열었다. 사이먼&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를 들으면, 내게 속삭이듯 다가오는 목소리로 마음을 다독여줬고, 아바의 Dancing Queen을 들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꿈꿀 내가 필요했다.

스마트폰으로 조지 윈스턴의 ‘December’ 음반을 찾았다. 재생창이 열리고, 미로처럼 꼬인 기억이 음악에 맞춰 풀어진다. 피아노 선율 사이 사이에, 내가 못처럼 군데군데 박혀 있다. 15살의 내가, 중년이 되어버린 나를 바라본다. 자잘한 주름, 살면서 겪은 생채기 몇 군데, 점점 느슨해지는 생각, 갈비뼈 사이를 파고드는 공허. 나는 생이 흐르는 대로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고 있다. 그동안 어떤 일은 꿈처럼 이루어졌고, 어떤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했다. 한 사람을 만나 미련하게 사랑했고 쓰라리게 이별했다. 이제 난 무슨 꿈을 꿔야 하는 걸까. 여전히 불안을 곁에 둔 채로, 가끔 작은 창을 연다. 항상 열 수 있어도, 마음은 열기 힘든 창 앞에서 머뭇거린다. 어렵사리 게워낸 글이 적힌 창에, 다음 걸음을 재촉하는 커서가 쉴새 없이 깜빡인다.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씩 걸어가.’ 나는 작은 창 안에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오늘과 내일과 어제를 천천히 밀고 나아간다.


* 수필은,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작은 창이다.

 

때론 접어둔 페이지에 마음이 갔다. 시간이 지나도, 흔적이 남아 쉽게 찾을 수 있다. 보고, 또 보아도 미련이 달라붙었다. 미련이 새겨진 페이지는 애써 찾지 않아도, 저절로 열리곤 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 냄새에서, 걷다가 우연히 들려오는 노랫소리에서, 짧디짧은 글귀 한 소절에서, 어떨 땐 잘근잘근 씹던 무말랭이의 짠맛 속에서도. 스르륵. 한순간 꿈처럼 페이지는 펼쳐졌다.
 
단정한 구두를 찾고 있었다. 구둣가게들을 돌며 살폈지만, 마음에 드는 구두가 없었다. 구두는 다음으로 미루고, 버스를 탔다. 뒷자리 구석에 앉아 주변을 훑어보며, 가방 지퍼를 조금 열었다. 좁은 틈으로 손을 넣어,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본 돈 봉투의 존재를 확인했다. 한 달 동안 옷가게에서 손님들이 헝클어둔 옷을 개고, 심부름과 청소를 한 대가로 받은 돈이었다. 봉투의 두께감에 마음이 부풀었다. 자취방에 오자마자,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할매요. 오늘 아르바이트비 받았는데요. 할매 구두 사러 갔다가 못 골라서 그냥 왔어요. 다음에 같이 가요.”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아이구마 됐데이. 니 필요한 거나 사라. 방학 동안 놀지만 말고 공부도 좀 하고. 내일 바다 놀러 가서 조심히 놀고. 알았제?”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 속에 가쁜 숨소리가 섞였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가슴이 답답해 병원 다녀왔다며 괜찮다고 했다. 별로 괜찮지 않게 들리던 얕고 빠른 호흡 소리. 반복적인 펄럭거림이 내 귓가에 남았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은 새벽부터 밭에 나가 일했다. 부모가 비운 자리에는, 항상 할머니가 계셨다. 1~3살 터울인 오남매는 별 탈 없이 자랐다. 아이들이 자라 시야를 넓힐 교육이 필요해지자, 할머니는 자취방 지원군으로 나섰다. 약한 심장과 절뚝거리는 왼쪽 다리를 이끌고, 아이들과 함께 낯선 도시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살뜰하게 밥상을 차렸고, 나는 깨작대며 밥을 남겼다. 콩잎김치, 깻잎 조림, 부추김치, 물김치, 콩자반, 무말랭이 같은 시골 반찬이 지겨웠다. 할머니는, 소시지나 햄 같은 반찬은 살 줄 몰랐다. 아들과 며느리가 보내주는 생활비를 아껴 쓰다 보니, 양파를 많이 넣은 돼지고기 주물럭은 단골 메뉴였다. 월세와 전기세, 수도세 같은 세금과 아이들 학비까지. 돈 들어갈 곳은 많았다. 식비를 벌어볼 요량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아침이면, 밤 한 포대가 집 앞에 놓여있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할머니는 방 한가운데 밤 자루를 펼쳐놓고, 밤껍질을 까고 있었다. 때론 밤 자루 대신 마늘 자루가 놓여있기도 했다. 아린 손을 참아내며, 저녁을 준비하던 할머니를, 나는 기억한다.

할머니는 유쾌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나운서가 ‘오늘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니, 그녀는 진지하게 ‘내가 더 감사합니다’라고 맞장구쳤다. 들을 때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언니와 오빠가 학교에서 늦게 올 때면, 우린 단짝이었다. 같이 저녁을 먹고, 화투를 치고, 드라마와 개그 프로를 보며 깔깔댔다. 어쩌다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눈을 뜨면, 어스름한 빛 속에 할머니의 작은 중얼거림이 들리곤 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한쪽 다리는 접고, 관절염으로 접을 수 없게 된 다리는 쭉 뻗은 채 앉아 계셨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옴마니반메훔’을 되풀이하며 두 손을 모아 빌었다. 매일 그녀는 무엇을 빌었을까. 20대에 남편을 잃은 후, 시집에 살며 홀로 아들을 키우고, 말년에 손주들까지 맡게 된 할머니. 할머니도 어머니도 아닌, ‘서주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삶은 어땠을까. 어쩌면, ‘옴마니반메훔’은 새벽마다 자신을 다독이는 주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편히 쉴 수 있는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첫 아르바이트비를 받은 날, 늦게 퇴근한 언니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여행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돈도 두둑하고, 다음날 친구들과 여행 갈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늦은 밤, 좀처럼 울리지 않던 자취방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언니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흐느끼며 울었다. 바라보고 있던, 내 심장은 내려앉았다.
“할매가 돌아가셨대.”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온몸이 떨렸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택시를 탔다. 세상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국도변을 달릴 때는 암흑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바로 구두를 사서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할머니가 더 오래 세상에 머무를 수 있었을까. 그녀가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다음’을 얘기했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차창 밖을 바라봤다. 유리창에는 슬픔에 갇힌 얼굴 하나가 보였다. 내가 울자, 창에 비친 얼굴이 따라 울었다. 멈추려 해도, 일렁대는 눈동자와 마주치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향집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숨결을 잃은 보랏빛 입술의 할매가 있었다. 대청마루에 퍼질러 앉아 현기증이 날 만큼 눈물을 쏟아냈다. 눈이 따끔거리고 쓰라렸다.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마당에는 멍석이 깔리고 천막이 쳐졌다. 온 집안이 문상객들로 북적댔다. 나는 문상을 따라온, 처음 보는 꼬마에게 밥을 먹였다. 아이는 무슨 일로 여기 왔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반찬만 요구하며 칭얼댔다. 나는 쩔쩔매며, 아이에게 밥을 먹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도대체 난 뭘 하는 건가. 무력감이 들었다. 가족들은 음식을 나르고, 수북이 쌓인 빈 그릇들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간은 묵묵히 흘렀다. 흐릿한 시야에 뿌연 사각의 물체가 아른댔다. 흰 천으로 감싸고, 광목 끈으로 동여맨 그녀의 요람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곡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 가족들과 장정들이 그녀를 호위하듯 둘러서서 동네 어귀로 천천히 걸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꽃상여가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는 아득하게 먼 곳으로 멀어졌고, 그녀와 함께 할 시간도 영원 속으로 흩어졌다.
 
구두를 봤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채로 어울리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굽이 나지막하고 연한 베이지색이라 차분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구두 위에 달린 여러 가닥의 태슬 장식은 자그마했다. 한 사람이 소환되었다. 유난히 까맣던 긴 머리에 동백기름을 발라 곱게 빗고, 끝이 길고 뾰족한 빗으로 가르마를 타서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는, 오른쪽 어깨로 늘어뜨려 땋은 후 돌돌 말아 올려 비취색 비녀를 꽂았다. 연한 분홍색 리본 블라우스에 정강이까지 오는 A라인 스커트를 입었다. 진열대의 구두를 신었다. 참했다. 찰나, 내 삶의 기척이 들려왔다. 꿈에서 깨어나듯, 눈은 초점을 다시 찾았다. 언제 어디서든 기다렸다는 듯이 펼쳐지는 ‘할매’라는 존재. 20년이 지나도, 할매는 내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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