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같이 할래요? >>>>>


해가 중천에 떴다. 여름 같은 봄날, 노란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다닌다. 아이들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올라간 입 꼬리는 내려오질 않는다. 놀이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도둑 잡기놀이, 유치원 역할놀이, 풀숲에 숨어있는 쑥 찾기 놀이, 민들레 홀씨 불기 놀이로, 쉬지 않고 계속된다. 엄마들의 눈은 아이들을 따라 바삐 움직인다. 아이가 놀이에 빠져, 엄마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엄마는 아이를 애타게 부른다. 불러도, 불러도 반응이 없으면, 바로 뛰어가 눈길이 닿는 곳으로 데리고 온다. 다른 엄마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둘째 딸의 유치원 참여수업 날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바쁘다. 평소 후줄근하던 일상의 옷을 벗고, 학부모 차림으로 변신한다.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이 관건이다. 얼굴에도 어느 정도의 예의를 갖출 요량으로, 바르고, 두드리고, 그린다. 치장하느라 정신이 팔려 늦으면 안 된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는 건 필수다. 유치원 등·하원 시간에 자주 마주쳤던, 엄마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고만고만한 아이들 중 딸을 찾는다. 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영혼이라도 다 줄 것처럼 바라본다. 참여수업 후엔 부모교육 시간이다. 오늘 부모교육은 나에겐 좀 지루한 시간이었다. 첫째 때 들어봤던 주제에, 이미 봤던 동화책 내용과 동영상이다. 어떠한 감흥도 없었다. 어떤 엄마들은 달랐다. 격하게 반응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처음 접하는 것은 언제나 신선하고, 놀랍다. 나도 첫째 때는 저랬겠지.’


부모교육이 끝날 무렵, 안면이 있는 두 명의 맘들과 자연스레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모두 아이가 둘이었다. 서로 동지애를 느끼며,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나이 터울이 무의미한 첫째와 둘째의 전쟁 이야기, 어린 둘째 때문에 도서관서 쫓기듯 나온 이야기, 글자를 모르는 6살은 이대로 괜찮은가에 관한 이야기, 아이 잠투정으로 고생했던 이야기, 모유를 먹이느라 3시간 이상을 못 자서 판다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 하루만이라도 편안히 자고 싶다는 이야기가 쭉 이어졌다. 얘기를 하다 보니, 둘 다 첫째를 처음 유치원에 보내는 맘들이었다. 여기선 그나마 내가 선배 맘이다. 선배로서 먼저 제안했다.

마치고, 점심 같이 할래요?”

좋아요. 둘째가 어린이집에서 올 때까지는 시간이 되요.”

옆에 있던 다른 맘이 말했다.

저희 둘째는 친정 엄마가 잠시 돌보고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해요.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 아시잖아요. 애들과 집에 있는 것 보다는 밖에 나가는 게 좋다는 거.”


아쉬워하는 맘의 마음을 알기에, 같이 좋은 방도를 궁리했다. 난해한 상황이었다. 그 맘의 친정엄마는 아이 보는 걸 즐기지 않고, 둘째 아이는 어제 밤에 잠을 설쳐서 바로 데리고 나오기 힘든 상황이란다. 식당이라는 막힌 공간은 어린 아이들이 싫어하기에 더욱 더 안 될 일이었다. 고심하다가 다시 제안했다.

오늘 날도 좋은데, 공원에서 자장면 시켜 먹는 건 어때요? 바로 수연맘 집 앞이잖아요.”

유치원을 마치고, 세 명의 아이와 두 명의 엄마가 먼저 공원으로 가고, 수연맘은 둘째 점심을 먹인 후, 공원에서 보기로 했다. 그녀는 첫째 애를 우리에게 맡기는 것이 조금은 불안한 듯, 아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공원에서 친구랑 놀고 있으면, 좀 있다가 엄마가 갈게. 공원 갈래?”

!”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구들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뛴다. 그녀는 아이의 모습에 안도하는 듯 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몇 년 전 나의 모습을 보았다. 어린 둘째 때문에, 모임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가더라도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둘째 꽁무니만 따라다니며,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던 날들, 그런 날들을 이 사람도 지금 보내고 있구나 싶었다. 자기 자신을 잃은 것 같은 날도, 지나고 보면 다 추억으로 남고, 아이들을 위해 노력한 자신에게 칭찬할 날이 꼭 온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자장면을 먹는다. 젓가락질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라 어떻게 먹일지 잠시 망설이다가, 혼자 온 아이부터, 먼저 한 젓가락 먹여준다. 우리 애는 둘째라, 어떻게든 먹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한 아이가 나 봐라.”하며, 어설픈 젓가락질을 한다. 그걸 본 아이들은 자신들도 할 수 있다며, 보란 듯이 면을 걸어 올린다. 자장면 한 그릇씩 차지하고 앉아, 얼굴과 옷으로 자장면을 먹는다. ‘친구와 함께라는 특별한 향신료가 뿌려진 자장면이라 더 맛있나보다.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장면 한 그릇을 비웠다. 까만 소스가 여기저기 훈장처럼 새겨졌을 때, 둘째를 데리고 그녀가 왔다. 엄마 없이 잘 있던 아이가 엄마를 보자마자 투정 아닌 투정이다. 엄마 없이 보낸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가보다. 이렇게 아이는 엄마와 함께 커간다. 아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질수록, 엄마에게서 멀어져 갈 것이다. 그때는 엄마도 자신만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여. 지금의 이 시간을, 아이들에게 뺏긴 앙증맞은 구속이라 여기고, 진득이 이겨내자. 장차 누릴 보석 같은 자유를 위해 저축해 두자. 언젠가 맞이할 해방의 날, 보란 듯이 시간의 적금 통장을 깨뜨려 쟁여둔 초보엄마의 설움을 날려 버리자.난 오늘도 아이와 함께 시간들을 쌓고 있다.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자유를 위해 시간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그 때엔 그 시간을, 나를 위해 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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