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영화와 김치밥국 >>>>>
휘파람소리가 난다. 갑자기 휘이잉 바람이 불어 종이 쪼가리와 건초가 나뒹군다. 나무판자 조각으로 지어진 주점에서 판쵸를 입은 남자가 문을 튕기며 걸어 나온다.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총자루를 두른 채 잔뜩 폼을 잡고는 시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다. 한 사내가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흙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말을 타고 달려온다.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본다. 꿈틀대는 손가락이 허리춤에 달린 총으로 향하면, 나는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주말 밤에, 오남매가 텔레비전 앞에 올망졸망 모여 있다. 이 시간이면 부엌은 요란스럽다. 아빠가 칼을 쥐고, 총총총. 뻘건 김치 국물이 주르르. 국물이 부글부글 끓으면 냄비뚜껑을 방패처럼 한손에 들고, 국자로 휘적휘적 젓는다. 구수한 냄새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아빠는 요리를 엄마의 고유영역으로 생각하고 침범하는 걸 꺼렸다. 하지만 야밤에 서부영화를 볼 때는 달랐다. 출출해진 아빠는 냉장고를 뒤졌다. 콩나물, 신 김치, 국수, 찬밥만 있으면 됐다. 미리 끓여 우려낸 멸치 국물을 냄비에 붓는다. 때로는 맹물을 쓰기도 한다. 냄비에 신 김치의 국물을 쪼르륵 따르고, 콩나물을 한 움큼 넣는다. 부글부글 끓으면 국수를 먼저 집어넣고, 신 김치를 퐁당, 찬밥을 풍덩 넣고 휘휘 저어준다. 마지막엔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끝이다. 파, 양파, 계란은 아빠의 기분에 따라 넣기도 빼기도 했다. 때론, 국수 대신 라면을 넣기도 했다. 그럴 때면, 면발 쟁탈전이 벌어졌다.
김치밥국이 완성되면, 오남매가 밥상으로 몰려들었다. 내 아래 꼬맹이 둘은 한 숟가락 먹고는 맵다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쪼르르 가버렸다. 나, 언니, 오빠는 아빠와 같이 야식을 먹으며 서부영화를 즐겼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밥국을 후후 불며 오물오물 씹었다. 아삭아삭 콩나물, 보들보들 밥알, 쫄깃한 면발, 서걱서걱 김치의 조합은 입 안에서 각자의 존재를 알리며, 어우러졌다. 엄마는 야식을 즐기지 않았고, 잘 밤에 왜 그렇게 먹느냐며 성화였다. 그래도 아빠는 서부영화를 볼 때면 김치밥국을 끓였다.
우리 집의 김치밥국 역사는 생각보다 길었다. 부모님이 가난한 시절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물에 된장을 풀어 김치, 콩나물, 찬밥을 넣어 죽처럼 끓여 먹은 것이 갱죽 또는 갱식이죽이라고 불리었다고 했다. 그 갱죽이 언젠가부터 우리 집에서는 김치밥국으로 불리어졌단다. 언젠가 나도 딸에게 이 김치밥국의 요리법을 전해줄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서부영화를 보며 먹었던 김치밥국의 맛은 뇌의 한 곳에 특별한 맛으로 새겨졌다. 내가 임신을 했을 때, 아빠가 끓여주던 김치밥국이 먹고 싶었다. 아빠가 하던 대로 끓였는데도 예전의 맛이 나지 않았다.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 김치밥국이 그립다 하니, “그게 뭐 별거라고.” 하며 껄껄 웃었다. 특별난 양념도, 고기도 안 들어가는 그 음식이 나에게는 별거였다. 가족이 복작복작 한 방에 둘러앉아, 서부영화를 보며 먹던 김치밥국은 나에게 추억의 맛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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