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곳으로 간다 >>>>>
성으로 들어간다. 셀 수 없는 문들이 빼곡히 들어서있다. 오늘은 어떤 문을 통할지 고민한다. 문을 빼꼼히 열고 얼굴을 드밀어본다. 활자들이 때로는 고요하게, 때로는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댄다. 그윽한 나무 향과 잉크 냄새가 코로 빨려 들어오면 평온이 나를 점령한다. 누렇게 변하고 너덜너덜해진 문을 살며시 열어보면, 천년 묵은 고목 같은 꼬장꼬장한 영감님이 앉아계신다.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그의 내면에 푹 빠져 들어간다. 세련되고 말끔한 문을 열어보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배냇짓처럼 신기롭다. 곳곳에 펼쳐진 신선한 발상에 눈이 번쩍 뜨이고, 머릿속도 찌릿하다. 이 문 저 문 열었다 닫았다 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어느 문을 열고 들어갈지는 내가 결정한다. 그 문 안에서 무엇을 찾고, 무얼 얻어 올 것인지는 모두 나에게 달린 일이다.
난 낚는 걸 좋아한다. 평소에 잘 가는 낚시 포인트는 도서관이다. 머리가 손을 따라 좌에서 우로 돌아가며 탐색한다. 눈은 제목을 훑고 지나간다. 제목이 나를 잡아당기면 반사적으로 팔이 그곳을 향한다. 검지로 책의 윗부분을 누르며 당기고, 엄지와 중지가 책 앞뒤를 감싸며 잡아챈다. 하나를 낚았다. 상판대기와 뒤태를 쓱 본다. 이제는 속을 볼 차례다. 목차 중에서 가장 끌리는 부분을 잠시 읽어보고, 스마트 폰으로 검색도 해본다. 서평이 대체로 좋다. 그럼 이 책은 낙점이다. 때로는 낚인 놈을 놓아줄 때도 있다. 매력적인 겉모습과 호평에 비해 내 마음을 채우기엔 허해 보일 때다. 안에 든 활자들이 살갑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고, 뻣뻣하게 딱 버티고 서서 도통 속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때는 나도 미련 없이 제자리에 놓아준다. 이런 식으로 나의 낚시는 가끔은 월척을, 가끔은 피라미를 낚는다. 집으로 돌아 갈 땐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선장이다. 두둑해진 가방을 들고 흐뭇하다.
중고서점에 가면, 내 안에 숨어있던 충동 의욕이 꿈틀거린다. 같은 텍스트가 들어가 있어도 가격은 새 책에 비해 저렴하다. 여기 온 녀석들은 전체적으로 누렇거나, 얼룩 몇 개 묻었거나, 긁힌 상처 몇 자국 있거나, 주름 몇 가닥씩 잡혀 있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도 담고 있는 내용은 새 책과 같은 것이니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줄만하다. 여기로 오기 전엔 누군가의 집에서, 가방 속에서, 차에서 지내며 그 누군가의 손길과 눈길을 받았었던 책들이다. 한때는 귀하게 대접받다가, 식어버린 사랑에 울며 처량하게 떠나왔다. 자신을 다시 사랑해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시련의 아픔을 끌어안고 가지런히 꽂혀있다. 내가 사랑해줄 만한 책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처럼 눈에 촛불 하나를 켜놓고, 뺐다 꽂기를 반복한다. 다른 이가 읽은 손 때 묻은 책을, 내가 다시 보는 것은 흥미롭다. 먼저 읽은 이의 흔적이 남겨진 책은 더 그러하다. 밑줄과 작은 메모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내 눈길은 그곳에 머문다. 내가 생각하는 문장의 밑줄과 그 사람의 밑줄이 일치하고, 책 한 모퉁이에 남겨진 메모의 내용이 내 마음에 와 닿으면 가슴이 저릿저릿해진다. 그 책을 읽은 미지의 그 사람과 내가 책을 매개로 이어진다.
대형서점에 가면, 눈은 초점을 잡기 힘들다. 대개 도심에 있어서 자주 오지 못해 더 애틋하다. 중고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따끈한 신간을 바로바로 보고 살 수 있어서 좋다. 여기저기 쌓인 책들을 보면 여기서 어떤 보물을 찾아서 가야할지 바쁘다. 이 책 저 책 잡히는 대로 들춰보고, 수많은 작가들과 얼굴 인사를 하고, 수많은 활자들과 겉핥기식으로 대화한다. 그 중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바닥에 퍼지고 앉아 들여다본다. 아이들에게 책을 사는 돈은 아끼는 게 아니라고 말하곤 했지만, 내 책을 살 때는 집안 경제가 떠오른다. 다시 들여다보고, 또 생각한다. 이 책은 꼭 사야 한다는 마음이 들면 그제야 얇은 지갑 문을 연다. 대형서점 갈 여유가 안 될 때는 동네 서점과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동네서점에는 내가 찾는 책이 없어서 헛걸음 할 경우가 많고, 인터넷 서점은 미리 내용을 훑어보지 못해 사놓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동네서점은 책의 양과 종류에서 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에게 밀린다. 도서정가제로 동네서점을 살리려는 노력이, 현실에서는 역부족이다.
사람들이 책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유명작가가 쓴 책 위주로 책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책을 택한다. 국제적인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은 별을 달고, 전국 서점에 쫙 깔려 순식간에 팔려나가고, 책 선택 순위 1위에 등극한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하고 흥미 있어 하는 분야의 책을 택하여, 파고드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지인의 추천대로 고르기도 하고, 때로는 필요에 의해 마지못해 선택하기도 한다.
나는 대학시절에 학교 도서관에서 흥미위주의 소설책들을 봤었다. 소설책을 고르면서 책장 사이를 왔다 갔다 거닐면, 책에서 풍기는 푸근한 냄새에 도취되어 서가에 꽂혀진 책들을 바라만 봐도 좋았다. 주부가 되고 아이를 키우다보니 책은 저 먼 기억 속에 묻혀 버렸었다. 여유 있는 사람의 사치로만 생각되었고,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유물처럼 느껴졌다.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 때, 책이 다시 내게로 왔다. 갑작스런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 책이 내 마음을 채웠다. 그 때 읽었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수업’, ‘인생수업’은 내 인생에 가장 기억남을 책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다. 읽으면서 위로를 받고, 삶을 재설정하도록 도와주었다. 류시화가 엮은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나온 작가미상의 ‘슬픔의 돌’이란 시를 보며 다시 내 마음에도 평온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주머니 속에 감춰도 뾰족하고 날카로워 쿡쿡 찌르며 아프던 슬픔의 돌이, 언젠가는 모서리가 둥글어지는 것처럼 나의 슬픔도 무디어지기를 기다렸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걱정도 슬픔도 책 안으로 쏟아 부었다. 책이 없었다면, 난 그 시기를 잘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책은 내 인생의 스승이며, 동행이다.
요즘은 나의 책 선택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육아에 몰두하던 몇 년 전엔 주로 시나 단편소설, 에세이, 자기 개발서 위주의 책이었다. 그 책들은 짧지만, 강한 문장들로 내 마음을 다독여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게 도와주었다. 이제는 예전에 도전조차 못했던 종류의 책을 읽으며 보낸다. 인문학, 철학, 고전들을 읽으며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간다. 책 두께에 위압감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다 읽었을 때 해냈다는 완독의 기쁨과 읽으면서 느껴지는 생각의 깊이감은 책을 놓을 수 없게 한다. 뉴스에서는 여가시간에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원래 책 읽던 사람의 책 읽는 양은 늘어났다고 한다. 책과의 동행을 해본 사람은 그 즐거움을 놓지 못하고, 멈출 수도 없다.
책은 읽고 읽어도 무수히 많은 책이 남아 있다. 내가 평생토록 읽어도 전체 책 수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책이 인쇄소에서 따뜻한 온기를 품고 나오고 있다. 수많은 책 중에서 선택을 하고, 그 속에 한 줄이라도 내 마음을 두드려 내 생각의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책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책이라도, 어떤 이에게는 하품만 나오는 잠 오는 책이 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이, 어떨 때는 장수한 책이 맛나 보이기도 한다. 책의 선택은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난 오늘도 성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어 슬쩍 엿보기도 하고, 두드리다 돌아오기도 하고, 활짝 열기도 한다. 내 마음이 허락한 문 안으로 들어가, 활자들이 모인 집합소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 속을 거닐다 보면 내가 애타게 찾던 보석들을 찾을 수도 있다. 그 보석들은 나의 머리와 가슴에 박혀 반짝거린다. 다시 그 문을 닫고 현실의 나로 돌아와도, 그 보석들은 나를 비추고 인도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그 곳 어딘가에는 있기에, 나는 그곳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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