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으로부터의 리포트>
p20
이제 문학은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들을 명명하는 것이고, 작가는 무슨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무엇을 명명하는 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명이란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p29
문학은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요, 삶에 대한 그 어떤 표현도 삶을 망가뜨릴 만큼의 가치를 갖지는 못합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말이지, 삶보다 노래가 더 중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중략)문학에 미치라는 말의 참뜻은 어쩌면 상식을 깨뜨릴 만큼 방탕한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 아니라 입에서 쏟아내는 모든 언어가 숭고해 보일 만큼 설득력 있는 삶을 살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옳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p37
헌대 그런 공부가 다가 아닙니다. 다른 한쪽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영역이 있는데, 세계관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제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모두 이 세 가지 한계가 맞닿는 어느 지점에 서있습니다. 문학의 대가 반열에 오른 원로들도 그렇고 이제 문학수업을 시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를 읽을 줄 모르면 울어야 되는 자리와 웃어야 되는 자리도 구별할 수 없어서 사오정의 신세를 벗지 못합니다. 상황을 모르는 자가 누구에게 웃음과 울음을 줄 수 있겠는지요? 당연히 세계를 통찰하는 능력이 결여된 감정은 문학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표현역량을 갖추어야 그걸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작방법의 문제인데, 이게 간단해 보여도 문예사조를 통해서 흘러온 다양한 시대착오와 성숙과 축적들을 슬쩍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납니다. 나아가 우리 동시대의 작가들이 터득한, 아직 전파도지 않은 방법들은 또 얼마나 많을는지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p43
한적한 시골길에 혼자 켜 있는 고독한 가로등처럼 존재하는 것, 이렇게 존재하는 자가 어법이 서툴거나 표현이 약하거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이 자의 입을 통해 명명되는 어둠 속의 것들의 가치가 작아질까요? 사실은 이것들이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문학입니다. 이렇게 혼자 제자리에서 빛날 줄 알면 이제 그 사람의 생을 통해서 문학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인간학으로의 초대>
p62
지상의 모든 존재가 이렇게 자신의 삶을 만물의 척도로 사용합니다. 그 때문에 인간의 삶 속에서는 어떠한 유형의 운명에 대한 공식도 그것이 공식이 되는 순간 운명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의 삶에는 분명히 섭리가 있을 테고, 어떤 합법칙성도 있어 보이나 이는 모두 과학이나 학문,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들과는 다들 수밖에 없어요.



p76
이 같은 내용은 글을 쓰는 과정이 단지 생각을 글자로 베껴내는 과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새로운 자기로 깨어나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보통 말을 하면서 세계를 깨닫고 그것을 정리하곤 합니다. 어려운 고민이 발생했을 때 상담이 필요해지는 것도 반드시 상대자가 해결책을 내려주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정리할 수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글쓰기는 말하기의 열 배 위력은 될 거에요. 머릿속에서 애매한 것은 써보면 압니다.

p78
독자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작가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그 뜻에 온몸으로 공감하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에요. 문학의 사회적 작용의 강력한 힘이 행사되어 버린 지점, 글쓴이의 생각과 독자의 이상이 결합해버린 지점, 이렇게 해서 내가 닿을 수 없는 어느 곳까지 나의 글이 떠돌아다니며 내가 할 수 없었던 역할을 합니다.



언어라는 생물에 대하여>
p90
과학의 언어는 개념적인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형상적인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성격을 배제시킨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성격을 품고 있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해석이 사용되는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창조에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통계와 보편을 다루되 통계, 수치 같은 데이터를 제공해서 지식을 주고 설득을 목표로 합니다. 예술의 언어는 감정을 담아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존재들의 삶을 통해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형상적인 사유를 잘하고 형상적인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이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고, 개념화를 잘 시키고 보편, 추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잘 포착하는 사람이 과학 쪽으로 재능 있는 사람입니다.

p94
우선 두 가지 차원에서 검토하고 싶은데, 하나는 작품을 수용하는 측면이에요. 영화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양을 보여주죠. 실제로 체험될 수 있을 것 같은 시각적, 청각적 감각을 그래도 제공합니다. 감상자는 눈앞에 보이는 대로 따라가면 되죠. 그러다 깜빡 한 눈 팔아도 영화는 멈추지 않고 흘러갑니다. 만화는 조금 다르죠. 창조과정은 일단 유사합니다. 서사를 펼치는 쪽에서 롱컷, 숏컷, 이렇게 샷을 잡아가는 방법도 똑같아요. 하지만 하나는 현실에 있는 것을 촬영해서 편집한 것이고, 하나는 그것을 그림으로 대체해요. 세상의 이미지가 컷, 컷, 컷으로 연결되면 영화를 보는 사람은 눈만 뜨면 되지만 만화를 보는 사람은 두뇌작용으로 필름을 돌려야 합니다. 문학은 어떻습니까? 창조자가 쓸 수 있는 도구가 글자밖에 없어요. 글자라는 기호로 만화 같은 그림을 그린 다음에 머릿속으로 또다시 영화형식의 필름을 돌립니다. 까닭에 시나 소설을 읽는 것은 영화나 만화를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정이 들어가죠. 영화가 1차적인 공정만으로 향유되는 거라면 만화는 2차적인 공정을 필요로 하는 거고, 문학은 3차 이상의 공정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뇌로 그림을 그려서 또다시 두뇌로 필름을 돌리는 능력이 부족하면 문학은 향유하기 어려워요.


p122
냉동된 언어는 문학의 언어가 아니고 활어는 문학의 언어입니다. 성격창조에 관여되는 언어는 무두 문학의 언어이고, 성격 창조와 무관한 언어는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비문학, 비예술의 언어예요.


노래와 이야기>
p136
단일한 상황, 장면 하나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것, 바로 이게 서사예요. 사람과 고기는 사흘을 함께 지내면 냄새가 난다고 해요. 이 냄새가 바로 서사입니다.


p138
서사적 방식이란, 단일한 상황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끝없이 변화 발전하는 상황을 연결시켰을 때에만 통하는 전달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사의 핵심은 우여곡절이에요. 세상사의 곡절들을 잘 읽고 그리는, 또 그것에 실감을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 서사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서사에서는 이야기 얽음새가 중요하겠죠. 구성의 문제가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p140
역시 밀란 쿤데라는 서사문학의 본질을 “인간 성격의 새로운 측면을 발굴하지 않은 작품은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말해요. 이야기를 풀어가는 패턴이 새롭고, 문체가 조금 새롭고, 그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새로운 게 새로운 게 아니라, 그 서사가 밝혀내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를 보여주는 인간 성격의 새로운 측면이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 새로운 소설이라는 겁니다. 소설가답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서정적인 장르, 즉 시에 대해서도 꽤 명쾌한 설명능력을 보여요. 밀란 쿤데라는 시를 “저 뒤쪽 어디에서” 오는 것이라고 정의해요. 어느 날 불쑥,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서 치솟아오는 것, 서정적 방식에 의한 것은 역시 감정 표출이 핵심입니다.


p142
(김성동 ‘길’ 소설 중에서) “산문이 발걸음이라면 운문은 춤이지.”



창작방법에 눈뜰 때>
p160
마르크스주의라 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이 먼저 떠오르죠. ‘유물론’이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즉 몸이 마음을 이끈다. 물체가 뜻을 만든다, 하는 세계관을 가리키는 낱말이고, 변증법이란 그런 세계를 인식하는 사유의 방법을 지칭하는 낱말입니다.


p164
중요한 것은 세계의 사물을 그렇게 보도록 인간이 훈련되어 있다는 것이지 객관 세계가 그렇게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풍경을 그릴 때 근대처럼 원근법에 의탁할 수도 있고, 고대처럼 역원근법에 의탁할 수도 있으며, 지금처럼 제 3의 방법에 의탁할 수도 있어요. 크게 보면 인류가 굉장히 긴 시간을 주기로 하여 감동을 표현하는 방식을 바꾸면서 어떤 조류를 형성하거나 변화시켜 왔어요. 그 때문에 문예사조라는 말이 생겨난 겁니다.


p167
글을 쓰는 사람에게 세계관의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가 세계를 읽을 줄 모르면 세계를 노래할 수도 없기 때문이에요. 저게 기쁨의 풍경인지 슬픔의 풍경인지 알 수 없다면 말초적이고 단순명료한 사실이 아니면 이야기할 수 없겠지요? 복잡다단한 사회현실을 어린아이가 보는 눈과 어른이 보는 바가 다르듯이 문제를 인식하는 자의 수준에 따라서 세계의 풍경은 천변만화하게 되어있어요.


p173
“문예 창작의 과정은 작가가 자기의 미학적 이상에 따라 인간과 그 삶을 묘사하는 과정이다. 작가가 생활 소재를 취사선택하고 평가하며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원칙, 그 전 과정에서 의거하는 형상 창조의 틀을 창작방법이라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