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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배우는 과정과 익히는 과정의 합이잖아요. 그래서 공부를 다른 말로 '학學'과 '습習'으로 이루어진 학습이라고 부르죠. 배워서 안다고 하면 익혀서 할 줄 알게 되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할 줄 알게 되어야, 그것도 능수능란하게 할 줄 알게 되었을때 그걸 삶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인간 관계도 익히는 것라고 생각해요.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만 '저 새끼랑 헤어지면 안 되니까 난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 보니 삶의 기술이 만들어지거든요. 반면 인스턴트화된, 네트워크적인 관계 속에서는 "저 새끼 기분 나빠, 안 봐"그리고 정말 안 보면 되니까 삶의 기술이 만들어질 수가 없죠. 그런데 지금 많은 영역에서 학생들의 익힘의 장은 없는 것 같아요. 배우면 익히는 게 아니라 배우고 바로 다음 배움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니 익히는 과정이 없어요. 그래서 배우긴 배웠는데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이죠.

p48
사회성을 익히려면 물리적으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따돌림도 당해보고하면서 대인관계에서 복잡한 부분에 대해 고민도 해보고 그래야 하는데, 이 공간을 누릴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청소년이 돼버리고 대학생이 돼버리는 친구들이 한 그룹 있다는 거예요.

p51
교육에서 얘기할 때 사람의 성장은 낯선 것, 타자와 부딪힘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많이 말하거든요. 내가 모르는 사람, 낯선 사람들과 섞이면서 그 속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자아 중심성에서 '아, 세상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구나, 남이라는 존재가 있구나'를 깨달으면서 눈치를 보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내가 언제 말해야 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진보적인 의미에서 바람직한가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사회화되어가는 과정이고, 사람이 성장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남이 하나의 남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남들'이 있는데 다양한 남들하고 섞이면서 일종의 면역력 같은 게 생겨야 조금 다른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적응할 수 있죠.

p52
있을 수 있는 아픔을 결정적인 트라우마로 인식하는 경우, 확률상 이런 정도의 아픔은 일상적인 아픔이라고 할 수 있는, 대인관계에서 주고 받을 수 있는 가시들, 공격성, 이런 것들인데 일부 친구들에게는 굉장히 씻을 수 없는 상처, 명치끝을 칼로 후볐다고 인지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바깥세상이 두려워지게 돼요.

p53
사실 삶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때 배울 수 있습니다. 존듀이가 말한 대로 불에 손을 집어 넣어서 손을 데는 과정이 있어야 불에 손을 넣으면 안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런 일체의 과정을 다 위험한 것이라고 불온시해요. 배우긴 배워야 하는데 위험하지 않게 배워야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삶의 과정에서 배우는 일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피해야하고 대신 그걸 커리큘럼으로 만들어서 관념적으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존 듀이 식으로 말하면 겪는 것이 없이 그저 배우는 것이죠. 그런데 기스 하나 없이 말끔하게 배우는 게 가능할까요?



p56
이제 사람의 성장이라는 게 업그레이드로 바뀌어버렸다. 스테이지원 클리어 하고 아이템 장착하고, 스테이지 투 클리어 하고 아이템 장착하는 게 마치 성장인 것처럼.

p61
자아 중심성이 굉장히 강하니까 자의식은 무척 높은데 자기 의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없고, 그러다 보니까 한편으로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남 얘기에 쉽게 넘어가는 거죠. 자기 의견이 없게 돼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장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기 말고 타인이 있다는 걸 인지해가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의견이 생겨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건, 어떤 이슈에 대해 내 의견을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이 성장인데, 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결정적으로 의견이 없을때가 많아요.

p64
의견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과의 대면 속에서 열심히 성찰을 해서 나만의 고유한 언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죠.

p71
시간도 공간도 계속 최적화되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해요. 최적화하려고 하면 할수록 의외성, 낯섦, 타자는 사라져버려요.

p75
모르는 존재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감정을 일으키죠. 하나는 두려움이고 하나는 호기심이에요. 공부라는 것이 끊임없이 모르는 존재를 만나는 일이잖아요? 모르는 걸 만났을 때 이 두 가지 감정이 다 일어나요. 그런데 중요한 건 '두려움을 어떻게 호기심으로 바꿔줄 것인가'죠. '낯설긴 하지만 재미있네?' 이렇게 두려움을 호기심으로 전환시켜주는 것 그렇게 꼬시는 것이 교육이에요.

p121
공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삶의 영역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까지 계속해서 식민화하고 규격화하는데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생각해봤을 때 두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첫번째는 시장의 창출이에요. 이 시장은 어마어마하거든요.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걸로 해서 교수직이 만들어지고, 학생들 등록금 내고 하는 게 엄청난 시장이죠. 또하나는 한국 같은 경우가 '이 분야가 먹고살 만한 곳이다' 그러면 공정해져야한다고 생각해요. 경쟁이 심한 사회이다 보니까 그렇겠죠. 그리고 그러자면 평가가 표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표준화된 평가는 곧 자격증을 의미하죠. 그리고 자격증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시험이 있다는 것인데, 시험이란 능력의 위계를 상정하는 것이죠. 결국 그렇게 되어야만 공정하다고 생각하면서 능력과 자격을 등치시키는 것이 한국에서 굉장이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p163
공부라는 것, 알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데에는 동기가 필요하거든요. 동기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절박감이에요. '이거 모르면 나 죽어',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 이런 것이죠. 두 번째는 경쟁심이에요. '쟤보다는 나았으면 좋겠어'하는 욕구. 세 번째는 '그냥 하고 싶어', '알고 싶어' 이런 이상적인 목표가 있는 거예요. 저는 이 세가지가 인간을 움직이는 추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세가지가 전부 다 없는 친구들이 있어요. 공부에 대한 흥미가 전혀 없는 아이들의 특징이 '안 한다고 큰일 나지 않아', 즉 절박감이 없어요. 어차피 굶지는 않거든요. 또 하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요, '분한' 아이들이에요. 하나 틀리면 질질 짜요. 아니면 자기가 누구보다 못하면 화내요. 공부에 관심없는 애들은 그런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런 친구들에게서 찾아야 하는 건 세 번째에요. "너 하고 싶은 게 뭐니?" 끝없이 물어봐요.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산하거든요.

p167
'그렇다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뭘까'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첫번째는 핵심, 맥락을 잘 잡아내는 거죠. 둘째는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료 많은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것, 셋째가 진짜 공부를 잘하는 것일 텐데, 이치를 깨닫는 것이죠. 큰 흐름 안에서 이게 뭘 의미하고 있고,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나아가서는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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