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을 다룬 소설이다. 입양되어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나나에게, 한국에 사는 영화감독 서영이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보자며 메일을 보낸다. 나나에게 영화를 찍는 과정은 암흑과도 같은 흐릿한 어린시절을 찾아가는 계기가 된다. 나나는 철길에 버려진 자신에게 '문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보살펴준 기관사의 행방과 주변인물을 알아간다. 그 여정에 서영과 소율, 은이 동행한다.
나나가 머무르는 서영의 자취방 1층에 있는 '복희식당'에서 식당주인를 만나고 친정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식당주인(연희) 또한 '복희'라는 아이를 벨기에로 입양을 보내 그 아이를 그리워하며 산다. 나나와 연희, 그 두사람은 입양보내진 자와 입양 보낸자의 마음을 보여준다.누구도 돌보지않는 아이를 맡아서 돌봤던 기관사와 기관사의어머니, 연희의 마음이 겹친다. 홀로 남겨진 자신에게 잠시나마 손 내밀어준 사람들의 마음에 닿기보다 증오로 가득했던 입양아 '문주'와 '복희'의 마음도 겹친다.
누군가 생면부지의 존재에게 이름을 불러주며 곁에 있어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버려졌다는 증오를 가득찼던 문주에게 연희의 삶의 이력은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문주는 흔적도 없는 자신의 엄마를 애도하듯, 연희의 마지막을 지켜준다. 기지촌에서 젊은 날을 보내며 11번의 중절수술을 받은 폐지 줍는 노파. 그녀의 마지막은 누가 애도해줄까. 문주(나나)에게 '우주'라는 존재가 있으니, 더이상 외롭지 않을까. 나나도 우주도 소멸하는 그 날까지 잘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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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
나는 암흑에서 왔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영원이란 무형의 테두리에 갇힌 암흑이 나의 근원인 셈이다. 방향성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나는 홀로 그곳을 떠돌았을 것이다. 그때 내 형상은 둥글고 단단한 씨앗 같았을까, 아니면 가늘게 이어지는 희끄무레한 연기 같았을까. 어쩌면 작은 반동에도 속절없이 무너지거나 흩어지는 가변의 물질이었는지도 모르고 아예 형상조차 없는 한 줌의 에너지였는지도 모른다.
p.27
내가 원한 보상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만인 것을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하는 것, 왜 버렸고 왜 다시 찾지 않았느냐고 아픈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물어보는 것...... 혹시라도 생모나 기관사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런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p.171
노파에게 나는 연희를 기억하게 될 이 지상의 몇 안 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연희가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해 두었다가 되새기고 애도해 줄 수 있는 사람, 죽음 앞에 섰을 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타인......
p.220
백복희로 태어났지만 스테파니로 살아온, 나와 넘버 원 닮은 여자. 우리의 닮은 구석은 눈매나 입매만은 아닐 터였다. 삶의 어느 장면에서 우리는 같은 자세로, 같은 표정으로, 같은 생각을 하며 투명한 벽 앞에 서 있곤 했을 것이다. 얼굴의 일부가 아니라 생애의 접힌 모서리가 절박하게 닮은 사람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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