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유령>
자신의 동생에게 죽음을 당하고, 사랑했던 아내까지 빼앗겼으니 얼마나 분통할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모르는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 유령으로 변한 건 아닐까. 아무도 모른 채로 죽어간 비화를 누군가 기억하고 애도해주길 바랬을 것이다. 원한 많은 귀신이 자신의 한을 값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듯이, 유령은 햄릿을 찾았다. 유령은 말했다. ‘어떤 식으로 이번 일을 추진하든, 네 마음을 더럽히거나, 네 어미에 대한 계책을 꾸미진 말아라.’라고. 감성적인 햄릿에겐 얼마나 힘든 부탁이었는지 유령은 알지 못한다.
왕비>
1막 2장 70
영원히, 눈꺼풀을 내리깔고 흙 속에서 네 고귀한 아버지를 찾으려 하지 마라. 넌 모든 생명은 죽으며, 삶을 지나 영원으로 흘러감이 흔한 줄 알고 있다.
4막 5장 17
죄의 참된 본질이 그렇듯, 병든 내 영혼에겐 사소한 일들이 커다란 불행의 전주곡 같구나. 죄의식은 서투른 걱정에 가득 차서, 엎지를까 겁내다가 스스로 엎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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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햄릿의 모습이 유별나다며 자신의 잘못을 망각으로 덮어버리려고 하나, 시간이 갈수록 피어오르는 죄책감으로 불안해한다.
왕>
1막 2장 87
허나 알아둬야 할 일은 왕자의 아버지도 아버지를 잃었고, 그 아버지도 아버지를 잃었다는 사실이야 - 그리고 유족들은 한동안 자식된 도리로 상례에 어울리는 슬픔을 보이게 되어 있지. 허나 끈질기게 집요한 비탄은 죄받을 옹고집의 길이고, 사내답지 못한 비애야. 그건 크게 하늘을 거스르는 태도, 약해빠진 심장, 조금한 마음, 단순하고 무식한 이해력을 보여주는 셈이야. 피할 수 없음을 알며 가장 흔해빠진 것처럼 눈에 띄는 일을- 왜 우리가 멍청하게 반발하며 가슴에 새겨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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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죽음을 흔해빠진 일로 일반화하여, 자신의 잘못 또한 별거 아닌 일로 넘기고 잊으려 한다. 과거에 어떤 잘못을 했건, 그건 과거일 뿐이라는 자기 합리화의 과정이 아닐까.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왕은 3막 3장에서 기도를 하며 참회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진실한 기도로 이어지진 못한다. 왕에겐 이미 지나간 일이다. 과거를 참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지금 현재 소유한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욕심이, 얕은 양심을 꺾어버린다.
햄릿>
1막 2장 77
전 보이는 건 모릅니다. 어머니, 저는 진실로 나타낼 수 있는 건 검은 외투, 관습적인 엄숙한 상복, 힘줘 뱉는 헛바람 한숨만도 아니고, 또 강물 같은 눈물과 낙담한 얼굴 표정, 거에다 비애의 모든 격식과 상태와 모습을 합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건 정말 보이지요, 누구나 연기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요. 허나 제겐 겉모습 이상의 무엇이 있으며, 그런 건 비통의 옷이요 치장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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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인간형을 보여주며,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겉모습이 아닌 마음에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왕비나 왕의 거짓 애도를 꾸짖는 장면.
1막 5장 95
잊지 말라고? 그래, 불쌍한 유령아, 이 혼란한 세상에 기억력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잊지 마라? 좋아, 내 기억의 수첩에서 젊은 시절 귀담아듣고 거기에 베껴놓은 모든 시시껄렁한 기록들, 온갖 책의 격언들, 모든 문구들과 감상들을 지워버리고 네 명령만 내 두뇌의 비망록 속에서 홀로 살리라, 저질 잡물과 뒤섞이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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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라는 유령의 당부에 햄릿은 기억하려 애쓴다.
3막 1장 56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자는 것뿐일지니, 잠 한 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 - 아, 그게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왜냐면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 받는 사랑의 고통, 법률의 늑장, 관리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단 하루 단검이면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 흘릴까? 국경에서 그 어떤 나그네도 못 들어온 미지의 나라, 죽음 후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의지력을 교란하고, 우리가 모르는 재난으로 날아가느니, 우리가 아는 재난을 견디게끔 만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양심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비겁자가 되어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름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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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을 만나고 복수를 꿈꾸고도 실행으로 바로 이어지진 않는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아버지의 부탁에 맞는 복수는 과연 무엇일까. 난 이 부분에서 며칠 전 본 드라마[이태원 클라쓰]가 생각났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못 본 척하는 고등학교 교실. 선생님도, 학생들도 그저 비겁자다. 악행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회피한다. 가해자는 학교의 이사장 아들이자, 대기업의 후계자. 모두 권력과 돈 앞에서 슬슬 긴다. 전학 온 아이가 전학 첫 날 그 모습을 보고, 가해자에게 말로 설득해도 듣질 않자, 주먹을 휘두른다. 양심에 따라 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실직과 자신의 퇴학처분. 세상은 양심 있는 아이의 편이 아니었다. 불합리에 속으로 분개할 뿐,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어찌 보면 자신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며, 자신의 몸을 움츠릴 뿐, 손 내미는 사람이 없다. 무모한 행동이라며 비웃음을 사기 쉽다. 햄릿의 대사에서 현시대를 본다. 우리는 불합리에 참을 것인가. 맞설 것인가.
4막 4장 33
모든 일이 사사건건 얼마나 날 꾸짖고 내 둔한 복수심을 찌르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을 판 主소득이 소득이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짐승 이상은 아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넓은, 앞뒤를 내다보는 사고력을 넣어주신 분께서, 그 능력과 신과 같은 이성을 쓰지 않고 썩이라고 주신 건 분명코 아니다. 헌데 이 무슨 짐승 같은 망각인지,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인지- 그 생각을 쪼개봤자, 반에 반은 지혜이고 나머지는 비겁함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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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햄릿 앞에 작은 땅 하나를 차지하려는 포틴브라스의 행동력을 보며 자극을 받는다.
5막 1장 210
알렉산더는 죽었다. 알렉산더는 묻혔다. 알렉산더는 가루도 변한다. 가루는 흙이고, 그 흙으로 우리가 회반죽을 만든다면, 왜 그의 변신인 회반죽으로 맥주통을 못 막지? 시저 황제, 그도 죽어 진흙으로 돌아가면 병 아가리 바람마개 되는 수도 있을 거다. 아, 세상을 떨게 하던 그 흙덩어리 몸뚱이가 겨울 바람 쫓으려고 벽 구멍을 때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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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를 지나다가 해골을 보고 결국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는 죽음의 섭리를 생각하는 햄릿.
5막 2장 212
아무 상관 없어. 우린 전조를 무시해.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잖은가. 죽을 때가 지금이면 아니 올 것이고, 아니 올 것이면 지금 일 것이지. 지금이 아니라도 오기는 할 것이고. 마음의 준비가 최고야. 누구도 자기가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지 모르는데, 일찍 떠나는 게 어떻단 말인가? 순리를 따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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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거두고 죽음을 운명에 맡기는 햄릿.
5막 2장 352
오 하느님, 사태를 미궁 속에 남겨두면, 호레이쇼, 난 크나큰 오명을 남길 거야. 자네가 나를 마음속에 품은 적이 있다면, 천상의 열락일랑 잠시 동안 미뤄두고, 이 험한 세상에서 고통 속에 숨을 쉬며 내 사연을 말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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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운명을 순리에 맡겼다할지라도, 죽음이 다가왔을 때 햄릿은 자신의 죽음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남은 건 오직 침묵뿐인 죽음이라도, 자신의 이야기가 호레이쇼를 매개로 포틴브라스에게 전해져 사사롭지 않은 명분을 가진 죽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사는 동안도 잘 살아야하지만, 죽을 때도 잘 죽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잘 죽는 건 무얼까. 죽음에 의미가 있다면 더할 나위없다. 육체의 죽음 자체보다, 죽어도 남은 이들에게 좋은 쪽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잘 죽은 사람 아닐까. 웰 다잉(well-dying)은 어쩌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가 내포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우선 잘 살아야한다. 죽음은 곧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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