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뿌연 하늘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온 사방에 꽂혔다. 잎사귀 사이로 몸을 숨겨보지만, 무작위로 쏘아대는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설익어 단단한 것들은 화살을 맞아도 끄떡없이 앳된 얼굴로 의기양양하다. 어느 정도 무르익은 것들은 쏟아지는 화살에 몸을 떤다. 스치듯 살짝 맞아도, 무른 살이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상처는 짓무르고 점점 커져만 갔다.

 

 한동안 마른장마의 연속이었다.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살구에게는 축복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당분을 축적하고, 농부가 퍼 올려주는 지하수를 빨아 먹고는 몸뚱이를 불려 나갔다. 풋내나는 초록빛이 차츰 줄어들고 노란빛을 돌기 시작했다. 이제 수확이 멀지 않았다. 살구의 당도는 농익은 주황빛이 띨 때가 제일 높지만, 상품성은 노란빛을 띠고, 물컹하지 않을 때가 적기이다. 아버지는 살구밭에 물을 대면서 곧 있을 수확기를 기다리며 흐뭇해하셨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됐다. 비는 줄기차게 차창을 때렸다. 흐릿하게 보이는 차선의 흔적을 찾으며, 장대비를 뚫고 친정에 도착했다. 주인 없는 빈집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 오는데 어디 갔어요?”

 “살구밭이야. 나오지 말고 집에 있어라.”

 엄마 목소리에는 빗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렇게 비 오는데, 왜 그래요?”

 엄마는 괜찮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살구가 뭐가 그리 중하다고. 엄마 옷장에서 색이 바랜 남방과 무릎이 나온 헐렁한 고무줄 바지 하나를 찾아 입었다. 신발장에서 엄마 장화를 꺼내 신고, 창고 처마 밑에 걸려있는 노란 우비를 걸치고 밭으로 갔다.

 

 떨어지는 빗소리에 인기척이 묻혔다. 낮은 자세로 밭을 둘러보니, 살구나무 사이로 얼핏 두 사람이 보였다. 주춤거림 없이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왔다 갔다 했다. 오로지 살구를 따기 위한 집념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흐릿한 시야에도 굵게 패인 주름이 도드라져 보였고, 눈두덩은 푹 꺼져 어두워 보였다. 검게 그을린 얼굴 위로 흐르는 빗물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왔냐. 집에 있으라니까.”

 자신들이 비를 맞으며 일하는 건 당연하고, 자식이 비를 맞는 건 아까운 분들이다. 농군인 부모는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세세히 알려주려 하지 않았고, 철모르는 자식들은 농사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이 자신들처럼 살지 않길 원했다. 자식들은 땅을 파며 살지 말고, 책을 파며 살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자식 농사는 지어졌고, 자식들은 모두 일을 찾아 타지로 흩어졌다. 지금 부모 곁에서 농사일을 도울 자식은 아무도 없다.

 

 비가 쉴 새 없이 어깨 위에서 타닥거렸다. 고개를 들어 높이 매달린 살구를 땄다. 비가 정면으로 날아와 얼굴에 떨어졌다. 빗방울이 목을 타고 비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경을 벗어 닦아도 잠시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장화 속에도 빗물이 철벅거렸고, 발가락은 불린 듯이 퉁퉁해졌다. 빗물을 가득 머금은 밭이랑은 질척댔고, 파인 밭고랑을 따라 웅덩이가 생겨났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내려다보니, 노란빛이 가득했다. 가지를 잡아당겨, 노란빛을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바구니도 몸도 점점 무거워졌다. 비가 그치고, 따면 되지 않느냐고 우매하게 대들었다. 비가 퍼부어도 지금이 따야 할 시기니까 해야만 한다고 했다. 내 눈으로 살구의 상태를 직접 보고는, 삐죽거리던 입을 집어넣었다. 살구들이 예리한 칼에 베인 듯 상처가 나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살구들이 아우성쳤다. 떨어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곧 자신의 몸이 찢어질지도 모르는 순간을 맞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세주처럼, 살구를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 애썼다. 축축한 옷도, 뻐근한 자신의 몸도 잊은 채 나무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부지런히 따 모았다. 어머니는 속살이 드러난 살구들을 대할 때면,

 “아이구. 어쩌나. 쩍쩍 다 갈라졌네.”

 한탄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너라도 와서 다행이다.”

 어머니는 감춰왔던 나약함을 슬며시 내비친다. 나는 농군의 자식이지만, 농사를 모른다. 일찍부터 부모와 떨어져 공부를 하고 직장을 다니고, 타지에서 살림을 차렸다. 농사짓는 부모의 고달픔이 내게 스며들 틈은 없었다. 부모는 자신의 고된 모습을 숨기고, 매번 괜찮다고만 한다. 전혀 괜찮지 않는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질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허물어지는 부모의 몸이, 하나씩 겉으로 드러날 때쯤 자식은 어쩔 줄 모른다.

 

 비가 계속 왔다. 빗소리에 부모의 거친 숨결이 섞인 듯했다. 살구보다 중한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떤 방패막이도, 작은 우산조차도 되지 못한다. 그저 꿋꿋이 살구를 땄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맞춰 ‘똑, 똑’ 살구 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비가 온몸에 스며들어도, 멈출 수 없었다. 흙에 묻혀 살아오는 동안 갈라져 버린 손끝과 울퉁불퉁한 손마디, 고된 노동에 어그러진 뼈와 짓눌린 혈관들,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간당간당 붙은 힘줄과 닳아버린 연골.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빗속에서 버티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양손으로도 살구를 땄다. 아무리 애태워도, 하늘은 무심히 비를 뿌렸다. 무력하게 하늘을 쏘아본들 무슨 소용이랴.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살구를 다 딸 때까지 함께 비를 맞는 일뿐이었다.

 

간격

 


주말이라 친정에 갔다. 봄날 오후에 몰려오는 나른함과 싸우고 있을 즈음, 고추모종 200포기가 배달되었다. 아이들은 풋풋한 모종에 시선이 쏠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기다린 손님을 맞이하듯, 반가워했다. 나도 왠지 모를 설렘으로 들떴다. 우리는 필요한 연장들을 챙겨 봄볕이 내리쬐는 뒷밭으로 갔다.


밭고랑에서 일을 분담했다. 까만 비닐이 씌워진 곳에 모종을 심는 것이 목표였다. 어머니가 보여준 시범에 따라 40cm가량 되는 막대로 거리를 가늠한 후, 모종삽으로 비닐을 푹 찔렀다. 모종삽은 비닐을 뚫고 잠자고 있던 흙을 깨워 옆으로 밀쳤다. 작은 구덩이 하나가 만들어졌다. 작은아이가 모종 하나를 구덩이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큰아이는 주전자에 담긴 물을, 구덩이에 가득 부었다. 다음 차례엔, 어머니가 모종을 반듯이 세워 잡고 모종삽으로 흙을 퍼서 가만히 덮어주었다. 아버지는 심겨진 모종 옆에 튼튼한 지주대를 하나씩 세웠다. 모종들은 점점 제자리를 잡아갔다.

 

막대를 들고 일일이 거리를 재어가며 구멍을 뚫는 나를 보고 작은아이가 물었다.

엄마, 왜 고추모종을 띄엄띄엄 심어?”

간격을 두고 심어야 서로 방해받지 않고 잘 자라거든. 너무 붙어있으면 뿌리끼리 엉키고, 가지도 부딪혀 잘 클 수 없잖아. 좁으면 서로의 잎사귀에 가려 햇빛도, 바람도 제대로 닿지 못해.”

아이한테 말하고 나니, 손에 쥔 막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막대의 길이는 수많은 경험에 의해 정해졌겠지. 이 정도 거리면 고추가 잘 자랄 수 있었다는 실제적 경험들. 내게도 막대가 있던가. 내 짧은 경험으로 만들어진, 허술한 막대로 거리를 재고, 마음을 심곤 했다. 마음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갔다. 이제 그만 뻗어도 되는 곳까지 계속 뻗어가 서로의 가지는 부딪혀 부러졌다. 잎사귀가 맞닿는 곳은 짓물렀고, 바람도 공기도 통하지 않는 꽉 막힌 곳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좋은 마음도 서로가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답답하고 자유롭지 못해 오래가질 못한다. 서로를 위해 어느 정도의 간격을 존중해 주어야한다.

 

사람 사이에서 상처를 받으면, 다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대체로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게 된다. 좀처럼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 못하기에, 간격을 좁히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가 각자의 공간에서 성장할 수 있게 바라볼 시간. 제 안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하나의 성숙한 개체로 존재할 때, 외부의 자잘한 마찰은 쉽게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서로가 나약해서 조금만 스쳐도 서로를 부러뜨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관계는 서로가 힘들다. 어느 쪽도 쉽게 상하지 않을 가장 이상적인 순간은, 각자 자신의 뿌리가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을 때일 것이다. 허나, 외따로이 떨어져 자기 자신을 키워나가려면 문득 문득 돋아나는 외로움은 견뎌야 한다.


때론 많은 시간이 흘러도, 가늠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다. 진심이 진심으로 통하지 않고, 꼬아서 해석하는 사람들. 생각을 알 수 없으니, 가끔은 얽혀 상처를 받았고, 가끔은 더 이상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사람마다 생각의 간격은 다르다. 우리는 고추모종처럼 동질적이지 않다. 그래서인지 난 아직도 적정선을 찾지 못해 헤맨다.

 

내게 신묘한 막대가 있어서 상대와 나와의 적당한 간격을 측정해준다면 어떨까. 가까이할지 멀리할지 정해주는 막대. 마음을 쓰지 않아 편할 것 같아도, 정해준대로 인간관계를 맺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다. 내 생각과 의지가 빠진 맹물 같은 관계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내게 맞는 막대는 경험으로 만들어 나가더라도, 든든한 지주대 같은 존재는 하나 있으면 좋겠다.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게 해 줄 삶의 조력자처럼, 내 마음에 지주대 하나 꽂아두고 살고 싶다. 그게 사람이건, 책이건, 문학이건, 그림이건. 뭐라도 괜찮지 않을까.


모종을 심다가 허리를 펴 하늘을 올려다본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어느 정도일까. 허공 속에서 가늠해 봐도 헛일이다. 간격은 대상과 대상 사이에서 가능한 일이니까. 우선은 나부터 가다듬어야겠지. 적당한 간격으로 잘 심겨진 모종을 쳐다본다. 연약하지만 하나의 군락이 된 모종집단. 서로를 북돋우며, 가끔은 지주대에 의지하며 모두 잘 자라길.


*지주대: 이식한 수목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막고 뿌리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발육하도록 수목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막대기.


- 수필미학 봄호 2020년

 

 


친정>

 

온기는 있으나 빈 듯했다. 거실에는 TV만 혼자 왕왕거리고 있었고, 주방에는 달그락거리던 소리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털어 개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었다. 방 한쪽에 널려있는 다리미대와 다리미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다림질했어요?”

네 엄마가 하고 간 거지. 그날 아침에 바쁘게 나갔거든.”

좀 치우시지.”

집안 살림에는 무심한 아버지다. 청소기를 돌리고, 바싹 말라버린 물걸레를 빨아 방을 닦았다. 이날은 엄마가 자리를 비운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싱크대 위에 냄비가 하나 보였다. 그 속엔 수저, 국자, 주걱이 걸쳐져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김치냉장고 속에 묵처럼 엉긴 곰국을 이 냄비에 덜었을 것이다. 국을 데워 밥을 말아 드시고, 가끔은 냄비에 김치밥국도 끓여 드셨겠지. 다른 식기들은 건들지 않고, 오로지 냄비와 수저, 국자, 주걱만으로 가능한 식사를 했을 것이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냄비가 왠지 짠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엄마가 만들어 둔 반찬이 가득했다. 시금치 무침, 도라지 초무침, 멸치볶음, 장조림, 김치가 투명한 유리 반찬통에 들어있었다. 반찬 뚜껑을 열어보니, 먹은 흔적 없이 정갈하게 담겨있었다.

아부지 반찬 안 드셨어요?”

점심과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밖에서 먹을 때도 있었고, 하루에 한두 끼를 집에서 먹으니 별로 손 안 댔다.”

 아버지가 멋쩍게 웃으며, 밥은 자신이 해서 다 먹었다고 했다. 보온시간 ‘52시간이 표시된 전기밥솥을 열어보니, 밥풀이 듬성듬성 붙은 채 누렇게 말라있었다. 15년 전에, 엄마가 새언니의 산후조리를 도와주러가서 한 달간 집을 비웠을 때, 아버지는 전기밥솥의 사용법을 익혔다. 그 후론 항상 밥은 문제없다고 말했었고, 엄마가 집을 비워도 걱정 없다 했다.

 

친정에 가면, 대체로 온돌방에 등부터 붙였다. 밥 때가 될 무렵, 부엌에서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바글바글 끓어대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커다란 양수냄비 안에서 초록빛 몸을 풀고 있는 나물 냄새, 직접 키운 참깨로 짠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여닫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가만히 누워 친정 냄새를 맡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곤 했다. “밥은 먹고 자라며 엄마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면, 그제야 어기적대며 몸을 일으켰다. 엄마는 밥 한 끼에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았다. 한 그릇 맛있게 먹고 나면, 음식에 담긴 곱디고운 마음 입자들이 내 안 어딘가로 스며들어 든든했다. 지금은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내가 주말 동안 친정에 머물며 밥을 챙겼다. 밥상을 들고 들어선 나를 보며 꼬맹이 딸이 말했다.

엄마가 할머니 같아. 할머니가 움직이던 대로 똑같이 움직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엄마를 따라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내 딸도 조금씩 나를 따라하겠지.

 

엄마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외출 준비를 했다.

전화 오면, 서문 오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라.”

엄마한테서 연락 오면 나가도 된다고 말해도, 아버지는 괜찮다며 서둘러 나가셨다. 별로 내색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엄마를 많이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엄마가 집안에 들어서자, 친정집은 다시 친정 같았다. 엄마는 서울에서 있었던 일들과 선물 받은 것들을 뜨끈한 온돌방 한가운데 풀어 놓았다. 아버지는 가만히 엄마의 얘기를 들었고, 선물 받은 장갑도 슬쩍 껴보셨다. 친정집의 공기는 원래대로 꽉 채워졌고, 나는 다시 온돌방 바닥에 붙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엄마가 안 계셨을 때 느꼈던 친정 분위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줬다. 친구들도 자신의 친정 얘기를 꺼냈다. 한 친구는 몇 달 전에 친정아버지가 뇌졸중으로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어,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했다. 좋아하던 외식도 꺼리고, 몸이 힘드니 더 역정을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친정엄마가 무릎 수술을 해서 활기찼던 엄마의 모습이 사라져, 예전처럼 편안하게 뒹굴 수 있는 친정이 아니라고 했다. 자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나약해져 가는 부모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자식을 위해 애쓰며 살아온 부모를 바라볼수록 애틋하기만 하다. 나도 언젠가는 내 딸들의 친정이 될 거다. 난 어떤 친정이 되어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선은 건강해야겠지. 나는 엄마처럼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데 어쩌지.

 

어린 아이들과 보내는 하루하루는 별걸 하지 않아도 빠르게 지나간다. 어느새 또 밤이다. 청소기를 돌리고, 밥을 먹이고, 아이들을 씻겼다. 잠잘 준비하라고 일러두고 설거지를 했다.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하나는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고, 또 하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하나는 심각했고, 하나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전등 빛 아래에서 책장을 넘기며, 글자 속에 담긴 의미들을 조금씩 씹어 먹는 아이들. 책에 풀어져 있는 이야기를 맛보고, 좋은 것은 계속 집어삼켰다. 나처럼 책 맛을 좋아해서 다행이다. 자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도, 이 시간이면 마주치는 풍경을 깨트리기 싫다. 나도 읽다가 접어둔 책을 가져와 아이들 곁에 슬며시 앉았다. 언제든 편안하게 책을 보며 쉴 수 있는, 책 냄새나는 친정은 어떨까. 그저 상상만으로 좋다.

                                                                       

현대수필 봄호 2020년


 

좋은수필에서 뽑은

베스트에세이10(2019)

놀랍고

고마운 일이다.

 

책은 말한다.

앞으로도 쓰면서 살아가라고.

힘내라고.

 

'해지'와 '와이셔츠'가 책에 실렸다.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와이셔츠>

         

언젠가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한 남자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옷장을 열어 아내의 옷을 쓰다듬고, 입어보는 장면. 남겨진 이의 아픔과 그리움이 처절하게도, 괴이하게도 보였다. 왜 저렇게도 잊지 못할까? 그때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남편이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삶에서 빠져나갔다. 칫솔, 스킨, 로션, 면도기, 속옷, 티셔츠, 남방, 바지, 벨트, 점퍼, 정장, 코트, 양말, 운동화....... 그의 물건들도 그를 따라 사라졌다. 서로를 지탱하며 걸어갈 삶은 아직 초입인데, 나와 아이만 길 위에 남겨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이들에게는 언제, 어떻게, 어떤 얼굴로 설명해야 하나. 남편이 사라진 날 이후로, ‘아빠는 출장 중이어야 했다. 아이가 아빠를 찾으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둘러댔다. 아이에게 말하듯, 나도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제발 꿈이었으면.’ 밤마다 빌었다. 아침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나를 깨웠다.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하면 할수록, 아이에게 거짓을 말하기가 힘들었다.

 

한 달이 지나갔다. 눈이 부셨던 오후. 큰아이를 불러 내 무릎에 앉혔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 눈과 맞닿은, 티 없이 맑기만 한 아이 눈은 무방비 상태였다.

너무 놀라지는 마. 엄마가 옆에 있잖아.”

흐려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한 달간 고심했던 말을 들려줬다.

아빠는 하늘나라에 먼저 갔어. 언젠가 우리도 거기에 갈 거야. 아빠가 일을 잘해서 하늘나라에 꼭 필요하다고 데려갔나 봐. 아빠가 열심히 살다가 하늘나라 갔으니까, 우리도 아빠처럼 열심히 살아야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어.”

아이 눈이 점점 동그래지더니, 소리 내어 울었다. 나도 참지 못하고 훌쩍였다. 5살 아이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죽음이란 단어에 부합하는 질문을 찾으려는 듯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차 사고 났어?”

아니, 회사에서 일하다가 사고가 났어.”

어떤 일?”

전기 일.”

아이는 글썽이는 눈으로,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몇 번을 되물었다.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실 앞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울음뿐이었다.

나는 아빠가 출장 간 줄 알았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미안해. 이제야 얘기해서.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 아빠가 일찍 가버려서 엄마도 슬퍼.”

졸지에 아비를 잃은 어린아이의 심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든든한 부모 아래 자란 내가 무얼 알겠는가. 그저 아이를 내 품에 안았다. 점점 가슴 언저리가 축축해졌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은 잦아들었고, 벌떡 일어나 동화책을 들고 왔다. 나는 평소처럼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다. 아이도 별일 없었다는 듯이 내가 읽어주는 책을 보고 있었다. 책 중에는 아빠를 잃어버린 어린 말 이야기책도 끼여 있었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어린 말이, 순간순간 아빠를 떠올리는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린 말은 어느덧 자라, 아빠처럼 멋진 말로 성장해 힘차게 초원을 달렸다. 큰아이와 나는 계속 책을 읽었고, 작은 아이는 배냇짓을 하며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우리는 살아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 남은 사람의 삶은 이어지니까. 눈을 돌릴 때마다 그의 흔적이 곳곳에 달라붙어있는, 우리 집을 떠나 친정에 머물렀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내가 아이들을 돌봤다기보다, 아이들이 나를 돌봤던 것 같다. 혹시라도 엄마가 정신 놓을까 봐,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갓난쟁이 둘째 아이는 울면서 꾸준히 나를 단련시켰다. 넋 놓고 있지 말라고,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고. 모유 달라고 보채고, 기저귀 갈아 달라고 울고, 재워달라고 칭얼댔다. 첫째 아이는 내가 마음 놓고 울 수 있게 도와줬다. 아빠와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아이라, 잘 놀다가도 갑자기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울곤 했다. 아이를 달래다가 때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이를 껴안고 같이 울었다. 우린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독이며, 애도의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잠시 잊고 있던 상실 조각들이 어둠 속에서 또렷한 빛을 발하는 별처럼, 머릿속에 점점이 박혔다. 숨죽이며 훌쩍이다 희붐히 날이 밝아오면, 내 옆에 잠든 아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다. 아이 얼굴에는 남편 얼굴이 잔잔하게 담겨있었다.

 

그와 살았던 우리 집을 정리했다. 장례식 때, 엄마는 사위 옷을 정리해 화장터에 보냈었다. 남겨진 흔적 속에서 딸이 힘들어할 것을 예견하고, 어서 털고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했었겠지. 옷장에 남은 내 옷은 이삿짐센터 차량에 실려, 친정에서 가까운 낯선 집에 방치되었다. 어느 정도 삶의 균형을 맞출 힘이 생겼을 때, 친정에서 독립했다. 고요한 밤. 큰아이 유치원 입학식에 입고 갈 옷을 찾으려고 옷장을 열었다. 반쪽이 빠져버린 옷장엔 공간이 남았다. 코트들을 뒤적이는데, 흰색이 보였다. 옷을 밀쳐보니, 와이셔츠였다. 그는 반소매를 입을 땐 105치수인데, 긴소매를 입을 땐 팔이 길어 110치수를 입어야 했었다. 유달리 길어 보이는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반가움과 원망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가, 잠잠히 고여 있던 마음 밑바닥을 뒤흔들었다. 부둥켜안았다.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와이셔츠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 밖에.

 

몇 년 지난 후, 아이들에게 와이셔츠를 보여줬다. 아빠가 입던 와이셔츠야. 입어 봐. 진짜 크지? 진짜 아빠 와이셔츠야? 그래, 너희 아빠가 이렇게 팔이 길었단다. 너희도 유난히 팔이 길잖아. 아빠 닮아서 그런 거야. 엄마, 와이셔츠가 이불 같다. 아빠는 키도 크고 덩치도 컸어. 그래서 아빠가 엄마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다고 했지. 아빠 구두도 하나 남아있어. 볼래? 발도 엄청 크단다. 엄마, 이건 보트 같아. 그러게. 발사이즈가 280이었단다. 너희 손발이 큰 것도 아빠 닮아서 그래. 둘 다 아빠를 참 많이 닮았어. 짤막한 엄마를 안 닮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둘째 아이는 롱드레스 같은 와이셔츠를 입고, 재미있다는 듯이 팔을 휘적휘적했다. 첫째도 입어보겠다며, 와이셔츠를 빼앗아 걸쳤다. 아이는 빈 공간을 메우려는 듯이, 팔다리를 자로 뻗으며 제 몸을 부풀리고 늘렸다. 공기가 빠져 쪼그라든 풍선처럼 아빠라는 존재가 빠진 와이셔츠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도 와이셔츠를 입은 아이는 아빠 품을 기억해내려는 것처럼, 팔을 둥글게 모았다. 그리곤 어깻죽지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아빠 냄새나는 것 같아.”

 

오랜만에 와이셔츠를 꺼냈다. 남편의 몸이 머물렀던 곳에 내 팔을 집어넣었다. 헐렁한 공간만큼 마음이 휑했다. 와이셔츠는 세월 따라 흰빛을 잃고, 누렇게 색이 바랬다. 내게 남은 남편의 기억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그래도 문득문득 흔적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가슴팍에 남아있는 작은 얼룩 하나. 그는 여기에 무얼 흘리고 간 걸까. 말해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묻고 싶다.

 

-<좋은수필 베스트에세이작품집>에 '해지'와 함께 수록. 2019년



무료(無聊)한 시간


엘리베이터를 탄다. 몇 층까지 왔는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질 못한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지금 당장 찾아야 하는 것도 없다. 시간을 때울 뭔가가 필요할 뿐이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사람과 어색한 눈인사를 나눌 뿐, 주변은 하나의 사물처럼 굳어버린다.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지만, 애써 형식적인 말을 건네지 않는다. 눈 둘 곳을 찾다가, 손바닥만한 화면 속에 숨어버린다. 어느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회피하는 행동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은 공간에 없다. 화면 속의 세계가 현실 세계를 조금씩 삼키고 있다. 


친구를 기다린다. 스마트폰은 여기서도 손에 붙어있다. 몇 시인지 시간을 본다. 언젠가부터 손목시계는 집에서 자고 있다. 화면은 다른 화면으로 계속 이어진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뉴스는 또 다른 뉴스를 쏟아낸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너무 많이, 너무 쉽게 보여준다. 곧 흘러가 버릴 것을 알지만, 마치 중독된 듯 훓고 있다. 화면을 향하고 있는 동안, 지금 있는 곳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지나치는 바람, 허공을 가로지르는 새소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꽃을 피워낸 민들레, 자신의 팔을 스쳐 지나가는 아는 듯 모르는 사람들. 주변이 나를 제외한 건지, 내가 주변을 무시한 건지. 나는 이방인처럼 멀뚱하게 서서 화면 속에 갇혔다. 어쩌면 스스로 택한 고립을 알면서도 길들어진 터치를 막지 못한다.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면, 그제야 화면을 닫는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현실과 얼굴을 마주한다. 


지하철을 탄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삼매경이다. 미뤄둔 드라마를 보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고, 웹툰을 보고, 카톡을 하고, 뉴스를 검색한다. 할 게 많으니, 무료하게 보낼 틈이 없다. 운좋게 자리에 앉으면 책을 꺼낸다. 읽다가 주변을 둘러보면, 책을 보는 행위가 이질적이다. 슬며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켜본다. 지하철을 막 올라탄 이도 소외되기 싫다는 듯이 너도나도 스마트폰에 자신을 옭아맨다.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다. 화면의 지시에 따라 손가락이 움직이고, 머릿속이 채워진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계속 집어넣는다. 화면을 닫고 나면 공허하다. 무얼 하긴 했는데, 무얼 한 걸까. 방대하지만 굳이 알 필요 없는 정보들, 서로 연결되어 댓글을 주고받아도 속을 알 수 없는 가면 쓴 사람들. 그 안에서 맴돌며 돌아다니다 나를 잃어버린다. 


밥을 먹는다. 가만히 앉아 밥을 뜨고 반찬을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는 정적인 시간. 누군가는 정지된 듯 무료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딜 수 없다. 식당에 가면, 스마트폰이 아이들 눈앞에 놓여있다. 어릴 때부터 화면을 보고 자란, 영상 세대 부모와 스마트폰 세대 아이들의 조합이 만든 풍경이랄까. 아이들은 화면이 끊어지면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보챈다. 부모가 아이 눈을 바라보며 영상이 재생되듯 노래하며 율동을 해도, 시선을 끌기엔 역부족이다. 못마땅해도,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화면을 내어준다. 화면에 불빛이 들어오면, 칭얼대던 아이가 조용해진다.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길들이는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듯 입을 벌리고 턱관절을 움직이며 밥을 넘긴다. 아이들은 현실에선 따라 잡을 수 없는 현란하고 자극적인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이들이 컸을 때, 지금의 기성세대와는 다른 생각 구조와 가치관을 가지게 되진 않을까. 깊이 생각하기보다 즉각적인 반응에 따라 행동하고 현실보다 현실에 없는 세계에서 무언가를 찾으며 꿈꾸게 되는 건 아닐까. 실제 삶에서 얻은 만족보다 화면 속 세상에서 얻은 만족이 더 우선시 될지도 모른다. 하긴 지금도 자신의 존재유무를 화면 속에서 인증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글을 기다린다. 텅 빈 화면을 열어두고, 잠잠하게 앉아있다. 지나버린 내 시간들을 하나씩 게워낸다. 화면에 일상이 한 자 한 자 채워지면 잃어버

린 내가 보인다. 나도 모르던 진짜 나, 글에 보이는 '나'는 가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글을 써서 가벼워지는 '나'도 있기에 쓰게 된다. 어떤 이는 나를 보고 무료한 삶을 산다며 안타깝게 여긴다. 좀 더 현실적인 일을 하라고 나무라기도 한다. 난 아직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고 맞설 자신이 없는 걸까. 좀 더 시간이 흐르길 바라는 걸까. 어쩌면, 빈 화면을 글자로 채우고 글자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무료함을 달래듯 시간을 갉아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런 무료가 좋다. 언제까지 글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지 나도 알 수 없다. 현실도 화면 속 세상도 때론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역행하고 싶어도, 어느 새 나도 흐름에 떠밀려간다. 생각 없이 흘러가다 허비한 시간이 내 뒤통수를 후려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문득 다른 이들은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료(無聊)하지만 무료로 흘러보내기엔 아까운 시간들을. 







조금 움직여 봐  >>>>>

  

 

항상 같은 공간 속에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 커다란 덩어리. 어찌할까. 손으로 주물럭거려 다른 형태로 바꾸고 싶지만, 내겐 그런 능력이 없다. 그저 보이는 대로 바라봤다. 나는 왜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곳만 바라보고 있을까. 볼 수 있는 것이 달라지면, 생각하는 것도 조금씩 달라질까.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고 싶다.

 

현관문을 열고, 반쯤 열린 중문을 통과해 거실에 들어섰다. 또 여기인가. 그날따라 유난히 거실 풍경이 숨 막힐 듯이 답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매일 맞닥뜨리는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왜 버티고만 있을까. 소파에 앉아, 거실을 둘러봤다. 가라앉은 마음이 거실 전체에 깔렸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햇빛이 잘 들어오는 거실 창문 쪽은 놀이매트와 장난감 자리였다. 나와 아이들은 수북이 쌓인 장난감들 사이에 뒤섞여 있곤 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에는, 공부할 공간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창가에 있던 큼지막한 장난감들은 작은 방으로 밀어 넣었다. 거실 창문 왼쪽에는 자잘한 장난감이 든 수납장을 놓았고, 창문 오른쪽은 책장과 책상을 두었다. 나는 연필을 들고 있는 큰애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작은애 사이를 오가곤 했다. 큰 아이가 피아노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책상이 방으로 들어갔고, 책상이 있던 자리에는 피아노를 두었다. 1년 남짓 지나니, 피아노는 작은 방 구석 자리로 쫓겨나,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눌려있던 내 욕망도 차츰 고개를 들었다. 은근슬쩍 거실 한쪽에 내 책상을 들여놓았다.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노력했고, 찾았다고 여겼지만 흐릿했다. 욕심이 커질수록 마음만 조급해질 뿐이었다. 애를 쓰다가도, 내 앞에 버티고 있는 덩어리와 맞닥뜨리면, 한순간에 공허의 늪으로 빠지곤 했다. 헤어날 수 없는 마음이 나를 지배할 때면,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책상 위에는 책과 붓, 물감들이 깔린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매트 위엔 아이들 장난감이 흩어져 있었다. 내 삶을 채우려다 깨져버린 내 마음의 파편처럼 어지러웠다. 잠시라도 숨 쉴 틈이 필요했다.

 

커튼 사이로 틈이 보였다. 민낯처럼 투박하게 다 보여주는 밋밋한 유리창. 거기에는 언젠가 내가 적어둔 글귀가 있었다.

"하늘을 봐. 너를 위한 선물이야."

글귀는 창밖에 보이는 하늘과 하나로 겹쳐졌다. 말간 하늘 배경에, 짧은 글귀가 적힌 액자 같았다. 그저 작은 위안이라도 얻기 위해 적어두었기에, 약간은 의도된 것처럼 다가왔다.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고 싶어, 소파에서 일어났다. 마치 어떤 돌파구를 찾기 위한 사람처럼 갑작스런 충동이 일었다. ‘조금 움직여 봐.’ 머뭇거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원래 있던 자리가 제격이라 생각하며 단념했었고,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할 덩치라며 생각을 접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바삐 움직였다. 창문 근처 바닥에 깔려있던 두꺼운 놀이 매트를 빼내고, 소파와 에어컨 사이에 있는 장난감 수납장을 잡아당겼다. 16개의 바구니가 꽂힌 수납장이라 힘에 부쳤다. 수납장의 바구니들을 1/3 정도 빼내고, 다시 앞으로 끌어냈다. 뒷면에는 먼지가 수북했고, 장난감들이 먼지와 얽히고설킨 채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다. 아이들도 마음 뒤편에 무언가를 숨기고, 털어내지 못해 쌓여 있지는 않을까. 수납장 뒤로 떨어져 있는 장난감을 하나씩 집어, 아이의 감춰진 마음을 털어내듯 털었다. 장난감 수납장을 내 눈에 잘 보이는, 거실 앞쪽으로 끌어다 놓았다.

 

공간이 생긴 왼쪽 창가로 소파를 밀었다. ‘자 모양의 큼지막한 덩치는 꿈쩍도 안 했다. 혼자서는 뭐든 쉽지 않구나. ‘혼자라는 느낌에 남아있던 힘마저 빠져나가는 듯 했다. 찬물을 벌컥대며 마셨다. 조금 의욕이 되살아났고, 조금씩 소파가 밀렸다. 먼지들을 쓸고 닦으며 적당한 위치에 놓았다. 정리하다보니, 허기가 밀려왔다. 이러나저러나 때가 되면 뭔가를 채워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서 애달팠다. 영혼의 허기도, 육체의 허기도 무엇 하나 채우지 못한 채로, 소파 위에 그대로 늘어졌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는 고요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빛이 느껴졌다. 세포 하나하나가 녹듯이 간지러웠다. 눈을 뜨고, 소파에 누운 채로 창을 올려다보았다. 창에 적힌 글귀대로 하늘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그 순간에는 배고픔도, 지친 몸도 잠시 잊었다. 소파를 창가로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이제까지 바라보던 하늘과 달리 보였다. 더 가깝고, 푸근했다. 저 하늘은 언제나 내 머리 위에 그대로 있다. 허나 왜 이 순간에 유난히 충만하게 느껴질까. 달라진 건 없다. 단지, 조금 다른 면을 보려했을 뿐이다. 다르게 보려고 하면 할수록 숨겨져 있던 어떤 면이 서서히 다가오는 건 아닐까.

 

내 마음방에서 몇 년째 요지부동인 상실 덩어리는 마음 한가운데에 놓인 채 그대로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편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게, 얼려버렸는지도 모른다. 더 차갑게, 더 단단하게. 이제는 그 덩어리를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다. 살아있는 것은 유연하게 살아야하니까. 온기와 틈이 있어야 어디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 덩어리진 마음을 따스한 빛 가까이로 움직여, 서서히 녹여 볼까. 그러면, 내 마음방 구석에 방치된 다른 조각들도 훈기를 받아 새로운 공간이 생기지 않을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일이, 슬픈 사고(事故)를 넘어 삶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사고(思考)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은 바뀌지 않아도, 생각은 바뀔 수도 있으니까.

 

아이들이 집에 왔다. 들어서는 순간, 눈이 동그래지며 말했다.

엄마, 우리 집 맞아?”

아이들이 보기에도 거실이 다르게 보였는지, 들떠보였다. 소파에 같이 누워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 사이사이로 환한 하늘빛이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졌다가 또 다시 내밀기를 반복했다. 빛이 들어오는 창 가까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도 조금씩 지나갔다. 더 따뜻하게, 더 유연하게.

  


빨래  >>>>

젖은 빨래는 묵직하다. 물방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누군가의 눈물처럼 멈추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범람 했던 자리라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기가 마른다. 내 눈물도 그랬을까

 

산후조리 중이었다. 산후도우미 아주머니는 9시에 출근이라, 아침에는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줬다. 아이가 일찍 깨면 분유를 타서 가져다주고, 쌀을 씻어 안치고, 쓰레기까지 말끔히 정리했다. 그 날은 다른 날보다 바빠 보였다. 나는 5살 첫째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둘째의 사이에 누워 뒤척였다. 남편은 욕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고 텀벙대는 물소리만 들렸다.

자기야, 뭐해?”

내 물음에 그는 바로 응답했다.

빨래해. 어제 낡은 공장에서 전기 작업을 했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옷이 엉망이 됐거든.”

남편의 옷은 사무실에서 전기도면 작업하는 날은 깨끗했고, 작업 현장에 나가는 날에는 먼지투성이가 되곤 했다. 비가 온 날은 흙탕물에 빠진 것 같았다. 심할 때는 애벌빨래를 해야만 세탁기에 넣을 수 있었다. 전날 밤엔 늦게 퇴근해 아침부터 빨래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출근시간에 쫓기면서도 나를 도와주려고 애썼다. 나는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섞여 괜히 심통을 부렸다. 남편의 손은 아침부터 흠뻑 젖어 있었다

 

잠결에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와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갔다 올게.”

나는 남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바쁘게 나가는 그의 뒷모습과 한 손에 든 쓰레기 봉지를 보며,

잘 갔다 와.”

했다. 그는 그렇게 집을 떠났다.

 

아이들은 보채다가 낮잠을 자고, 산후도우미 아주머니는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했다. 집안은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고, 바깥은 살벌할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한 통의 전화가 집안의 정적을 깼다. 그 전화는 나를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았다.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물속에 잠겼다.

말도 안 돼.”

나는 그 말만 되풀이했다. 원하지 않는 나에게, 머리는 재현하듯 상황을 그렸다. 남편의 젖은 손과 그 손으로 파고 들어간 강한 전류. 생각만으로 내가 감전된 것처럼 진저리쳤다

 

그 사람에게 뛰어갔었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러질 못했다. 아이들을 그냥 두고 나갈 수 없었다. 나는 섬뜩할 만큼 이성적이었다. 산후도우미 아주머니를 다시 부르고,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그 사람이 나만 두고 먼저 갔대. 병원으로 좀 가 줘.”

거실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돌아다녔다. 남편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도 무심한 통화음만 반복되었다. 내 속은 미쳐 날뛰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방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

 

홀로 택시를 탔다. 창문 위로 빗물이 끓임 없이 흘러내렸다. 오한이 들고 떨렸다. 아버지에게 전화해 나도 믿지 못하는 일을 전했다. 누군가 빨리 내 곁에서 나를 잡아줬으면 했다. 그러기에는 모두가 너무 멀리 있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은 쏟아지는 비로 꽉 막혔다. 창밖은 뿌옇고 흐려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고,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곳을 향해 가는 듯 멀게만 느껴졌다. 시간은 장마의 한 가운데에서 젖은 채로, 발이 묶여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응급실이 아니라 영안실로 가랬다. 곤히 잠 든 남편을 봤다. 틀림없는 그였다. 이상하리만큼 평온해 보였다. 낯선 사람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나를 막았다. 사고 경위를 조사해야한다는 차가운 말이 날아왔고, 손조차 만지지 못하게 했다. 손만 잡으면, 그가 내 손을 감싸 쥐고, 집에 가자고 할 것 같은데, 난 그러지 못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그를 바라만 보고, 그냥 두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그가 있는 곳의 문을 다시 두드리고 싶었다. 왜 그들이 내 남편을 잡아두고 내가 만지지도 못하게 한단 말인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주저앉았고, 언니는 나를 안고 울었다

 

난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엔 망상이 돌아다녔다. ‘혹시,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아닐까. 문이 잠겨 못 나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를 구해야 해.’ 그가 다시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전화가 울리면 그가 집에 온다는 전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수차례의 헛된 기다림이 계속 되었다. 영안실에서 본 온기 남은, 그의 모습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주검을 마주하고 집에 돌아왔다. 온통 눅눅하고 찝찝했다. 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품에 안긴 아이의 얼굴 위로 떨어져, 다시 아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가 바동거렸다.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렀다. 삼킬 수 없는 울음이 목에 걸렸다. 막힌 숨을 토해내느라 노래는 자꾸 끊어졌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지치지 않고 이어졌다. 둘러봐도 집안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눈을 돌리다 베란다의 빨랫줄에 눈이 멈췄다. 그가 아침에 널어놓고 간 껍데기가 보였다. 젖은 채로 늘어져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원래대로 마르기 위해 애를 쓰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왜 안 와?’

난 되물었다.

넌 거기서 뭐하고 있니. 이제 그는 없는데.’

 

그는 몰랐다. 평소처럼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아침이 오면 다시 출근하는 평범한 일상이 계속될 거라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빨래를 빨아서 널고, 마르면 다시 입으려고 생각했을 거다. 나와 같이 늙어가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삶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우리는 몰랐다. 우리의 삶이 한 순간에 깨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 순간에 서로가 넘을 수 없는 다른 세계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허우적대며 서로를 애타게 찾아도, 우리는 닿을 수 없었다. 장마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한없이 물기를 내뿜고 있었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젖은 빨래가 말라가도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이생의 물기를 다 털고 가볍게 훨훨 날아갔을까. 남편이 남겨두고 간 마른 껍데기를 태웠다. 남겨진 내 마음도 그것들과 같이 타들어갔다. 바스라질 듯 타버린 내 마음 안으로 서서히 아이들이 들어왔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내 마음을 적셨다. 그의 눈빛을 닮은 눈동자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웃었다. 나도 바보처럼 따라 웃었다.

 


 

 

해지 >>>>>

  

핸드폰을 해지하러 대리점에 갔다. 주인 잃은 핸드폰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 해지 전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전원을 켰다. 다시 생명을 얻듯 불빛이 반짝였다. 갑자기 노래가 흘러나왔다. 잘못 누른 걸까. 재빨리 소리를 줄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음악 파일이 재생 중이었다.

 

꿈속에선 보이나 봐. 꿈이니까 만나나 봐.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 꿈속에만 있는가 봐.

- ‘부활의 노래. ‘생각이 나

 

남편의 핸드폰은 다시 살아나 노래를 불렀다. 가슴이 일렁거렸다. 눈물샘은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대리점 안은 고객들로 소란스러웠고,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카락 안으로 숨었다. 가려진 작은 공간에서 노래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노래였을까. 이 노래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나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노래일까.’ 두 손으로 지압하듯 눈을 꾹꾹 눌렀다. 이제 그만 멈추라고

 

해지는 서류가 필요했다. 그와 내가 이 세상에서 맺은 관계가 적힌, 종이 쪼가리를 원했다. 혼인관계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와 같은 서류는 그와 내가 부부였고, 가족이었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제 서류는 다른 것도 말해줬다. 내 삶도, 내 가정도, 내 아이들도 불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배우자 이름 옆에 네모 테두리로 사망이라고 찍힌 후로, 세상이 나를 다르게 보는 듯 했다. 어쩌면, 출근했던 남편을 영안실에서 마주한 순간, 나 스스로 예전과 다른 나로 인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서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서류를 내밀 때면, 한없이 초라해졌다. 서류를 보고 알았다는 듯이, 흘깃대는 사람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받아야 했고, 서류를 보고도 내 상황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 입으로 직접 알려줘야 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와 나의 관계를 알리고, 그가 내 삶 속에서 빠져버린 이유를 설명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죽음을 말해야 했다. 그럴 때면, 마치 내가 금기어를 말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 이 세상에는 죄를 짓고도 떳떳하게 제 할 말하며, 아무 잘못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나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세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걸까. 왜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어야 하나. 사랑한 것이 죄는 아닐 텐데. 상실 후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두려움과 헛된 죄책감은 한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세상은 무심했다. 그가 없어졌는데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러갔다. 나만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춘 채,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 애썼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눈을 비비며 다시 봐도, 언제나 지금 현실에 놓여 있었다. 울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남편과의 사별은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살아온 삶이 짧은, 30대 중반에게는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문제였다. 머리로 생각해도 풀리지 않았고, 마음으로 풀려 해도 눈물에 젖어 번지고, 찢어져 문제조차 읽기 힘들었다. 별도리가 없었다.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움직였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내 앞에 놓인 것들을 풀어야 했다. 시계 방향에 맞춰, 시계의 움직임을 따라 하나씩 풀어가는 것. 그게 세상을 사는 법이었다.

 

남편의 해지 담당자는 나였다. 세상의 틀 안에서 그가 맺은 계약들을, 내가 해지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순 있어도, 나를 대신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맡고 싶지도 않았지만,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맺은 관계 중 가장 친하고 가까운 관계는 나였으니까. 계약 당사자는 아무리 불러도 불러낼 수 없다. 이미 죽음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버렸으니까. 그는 거부할 수 없는 힘에 끌려, 낯선 세계로 넘어가 멀뚱히 이 쪽을 바라봤는지도 모른다. ‘여기는 어디고, 저기는 어딘가. 왜 다시 건너가지 못하는가.’ 우리가 고심해도 여전히 나는 여기에, 그는 저기에 있다.

 

해지는 내 삶 속에서 그를 지워나가는 과정이었다. 계약을 하나씩 해지할수록 그 사람의 흔적이 하나씩 지워졌다. 내 곁에서 평생 함께 할 거라던, 그는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갔다. 어떤 곳은 그의 이름이 있던 자리에 내 이름이 들어가 앉기도 했다. 결국, 모든 삶의 서류에 그는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아직 존재했다. 누군가 나에게 반복된 해지 작업을 시키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받아들이라고, 이렇게 서서히 지워나가는 거라고 말이다. 상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내 손으로 끊고 지우는 것은 잔인했다.

 

핸드폰은 서류가 있으면 해지할 수 있다. 마음은 지우고 싶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고, 지우기 싫다고 지워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서류를 내밀어야 마음 해지가 가능할까. 가족관계증명서를 가만히 바라봤다. ‘배우자이름 옆에 선명하게 찍힌, ‘두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 예전에는 한낱 서류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사망이란 글자로 도배된 상실의 공간 같았다. 상실의 흔적 없이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릿함이 흐릿해지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다. 아래 칸으로 내려가니 자녀가 보였다. 큰딸, 작은딸 이름이 칙칙해진 내 눈을 밝히듯, 차례로 들어왔다. 우리가 있다고, 혼자 아프지 말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뭐든 같이 하자고 했던 남편과 나의 약속이, 이젠 나와 아이들의 약속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서류를 접었다. 아무래도 이번 생엔 해지 불가다.

 

  

 

 

 

 




시접 한 쪽  >>>>>

 

잘렸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순간에 잘려 버린 그 자리를 어떻게 메워나갈 수 있을까. 나는 살아가면서 그 자리를 순간순간 느낀다


미리 그려놓은 옷본을 원단에 대고, 박음질할 선을 그었다. 박음질 선에서 1cm 정도 더하여 둘레를 따라가며, 솔기를 이루게 될 시접 선도 그렸다. 가위가 시접 선을 따라 경쾌하게 움직였다. 바지의 앞판을 자르고, 이어 뒤판을 자르다가 그만, 싹둑. 시접이 잘려나갔다. 어이없이 한순간에 잃었다. 잘려나간 뒤판 시접 자리만 바라볼 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만들던 것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잘려나간 부분에 시침핀을 꽂고, 신경 써서 재봉틀로 박았다


아이의 쫄쫄이 바지 하나를 완성했다. 바느질이 삐뚤빼뚤하고 엉성해도, 내 손으로 만든 바지라 마음이 끌렸다. 갓 만들어진 바지를 자고 있는 아이에게 입혔다. 신통하게도 잘 맞았다. 원단에 그려져 있는 금빛의 작은 리본들이 아이의 다리 위에서 빛났다. 이 모습을 내 눈에만 담아두긴 아까워서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잠에서 깬 아이는 쫄쫄이 바지를 보고 좋아했다. 바지를 입고 한참을 잘 놀던 아이가 바지의 허벅지 안쪽 부분이 터졌다며 터진 부분을 가리켰다. 시접이 잘라져버린, 그 곳이었다. 단단하게 박는다고 박아도 시접이 없으니, 아이의 움직임에 견디지 못하고 틈이 벌어졌다. 틈사이로 연약한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살결에 가냘프고 앙상한 다리를 가진 아이. 그 아이를 보고 있으니, 잘려나간 시접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둘째 아이의 가족운동회 날이었다. 첫째 때 이미 겪어본 일이지만, 또다시 망설여졌다. 가족운동회라면, 엄마와 아빠가 거의 참석한다. 이런 일이 닥치면 내 마음을 꿰매 둔 실밥들이 터지려 했다.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게 가는 거야.‘

다짐을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 다시 용기를 냈다.


주차를 하고 가방을 둘러매고, 자동차 트렁크에서 돗자리를 꺼내 어깨에 걸쳤다. 아이 둘의 손을 잡고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장 쪽으로 걸어갔다. 앞서 걸어가는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와 아이와 아빠가 서로 손을 잡고 걸어가는 평범한 가족의 뒷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가족의 표본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나도 거기에 속해 있었다. 이제 나는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모습이다. 모두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눈이 아려왔다. 나의 감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되지 않게 아이들의 손을 꽉 잡고 팔을 흔들면서, 보폭을 크게 걸어갔다. 괜히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저기 풍선 장식 봐봐. 우아, 운동장 멋지다.”

손을 잡아끌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첫째 아이의 눈은 이미 부러움으로 일렁거렸고, 아무것도 모르는 둘째는 신이 나서 폴짝거렸다


운동회가 시작되었고, 부모와 아이가 짝을 이뤄 줄을 섰다. 엄마는 왼쪽에, 아빠는 오른쪽에. 내 아이의 오른쪽은 휑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둘러보니 엄마 혼자 온 집도 드문드문 보였다. 토요일에 일하는 아빠들은 오지 못해서일 것이다. 못 오는 것과 오지 못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만, 나에겐 조금 위안이 되었다. 우리만 다르게 보이진 않을 테니깐 말이다.

운동장 하늘에 떠 있는 풍선처럼 기분을 띄우려고 노력했다. 아이의 달리기를 응원했고, 1등으로 들어 온 아이를 꼭 안아줬다. 나도 엄마들 달리기에 나가서 1등 도장을 찍었고, 아이와 하는 게임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자꾸 큰아이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홀로 돗자리를 지키고 앉아 경기를 바라보는 눈동자와 마주치면 내 마음이 헛헛했다.


간식 시간 후에, 아빠와 엄마가 아이를 고무 대야에 태우고 반환점을 돌아오는 게임을 한다고 했다. 나는 주저했다. 옆에 있던, 아이의 친구 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안 오셨나 봐요. 저희 남편이 도와 드릴게요.”

마음은 고마웠지만, 내 표정은 어색하게 굳어졌다. 마음 깊이 눌러놓은 서글픔이 빠져나오려고 했다.

나 혼자서는 안 되는구나.’

게임이 싫었다. 아빠가 안 온 사람도 있는데, 왜 힘쓰는 게임을 넣었을까 싶어 프로그램을 짠 선생님들이 원망스러웠다. 선생님이 난감해하는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넌지시 말했다.

어머니, 저와 같이해요.”

아이는 선생님과 같이 게임을 하는, 특혜를 얻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운동회가 끝나고 나니 후련했다. 그 없이 홀로 또 하나의 작은 고개를 넘었다


내 삶은 순간순간 터질 듯이 아슬아슬하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없어져 버린 그 자리가 보이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남편이 내 옆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의 자리가 영원히 거기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의심조차 없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그를 잃고 나서야 알았다. 다시는 그도, 그의 자리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도안 그리듯이 반듯하게 그려놓은 우리 가족의 미래가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되어 날아가 버렸고, 남겨진 나는 내 앞에 닥친 현실을 자책하고 힘들어했다. 그가 없어졌는데도, 시간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흘러갔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나에게 맞는 새로운 도안을 다시 그리고, 그가 없는 삶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그럭저럭 꿋꿋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예상치 못한 상황들 앞에선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비어버린 자리 주변에서 아빠를 찾고 있을 때는, 나는 겉으로는 안간힘을 쓰며 담담한 척 해보지만, 속으로는 주체하지 못하고 울먹인다


앞판과 뒤판의 시접이 만나 솔기가 된다. 솔기는 앞판 시접과 뒤판 시접이 같은 비중으로 존재해야만 튼튼하다. 어느 한 쪽 시접이 잘라져버리면 그 자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곳이 된다. 솔기는 가정을 감싸는 줄이다. 엄마와 아빠의 자리, 두 개를 맞대고 꿰매 가정의 테두리를 만든다. 우리 집의 솔기는 부실하다. 한 쪽이 잘려나가, 그 자리를 꿰매도 터질까봐 마음이 불안하다. 나는 남은 한 쪽 시접이다. 혼자 감당하기 버거워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잘 지나가게 애써야 한다. 아이들과 내가 세상 속에서 터져, 맨살이 드러나 상처를 받기도 하겠지만, 흐릿하게 남은 시접의 흔적을 끌어당겨 다시 꿰매어 가며 살아야 한다. 그건 한 쪽 남은 시접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고, 의무다


지난 5년간의 사진을 찬찬히 훑어봤다. 두 아이는 그새 6, 10살이 되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아이들에게 미소를 보내줬다. 한 쪽 시접으로 버틴 5년이란 세월이 사진 곳곳에서 보였다. 아등바등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쏟아 부으려고 했었고, 잘린 시접 한 쪽이 표시나지 않게 하려고 애쓴 날들이 있었다. 앞으로도 잘려나간 시접 한 쪽의 흔적은 계속 내 눈에 보이고,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가끔은 빈자리를 보며 멈칫하기도 할 것이고, 가끔은 그 자리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빈 곳을 메워나가려고 노력 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랬듯, 나에게 주문을 걸어본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터진 쫄쫄이 바지를 재봉틀로 다시 박는다. 또다시 터지지 않길 바라며.

 

*솔기: 옷이나 이부자리 따위를 지울 때 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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