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제작되어 넷플릭스에 공개될 예정이라고 해서 더 관심이 갔다. 이야기는 니나의 엄마인 아만다와 카를라의 아들인 다비드의 대화체로 진행된다. 읽는 내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대화체로 엮어서 어떤 부분에선 모호하고 흐릿하다. '구조거리'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아이를 구하러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어린 아이를 키울 때 느껴본 거리다. 특히 유아기때까지는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내 시선이 움직였다. 순간순간 위험하진 않은지, 이상한 걸 삼키진 않은지 불안했다. 아만다나 카를라처럼. 이 소설에서는 부모가 아무리 아이를 가까이에서 관심을 갖고 돌봐도, 어쩔 수 없이 놓치기 쉬움을 보여준다. 무조건 부모를 탓할 순 없다. 주변이 모두 오염되어 인체에 해로운 환경이라면, 개인의 힘으로 원인을 알아내기 힘들다. 마을 전체가 중독되어, 서서히 죽어나가도 개발이나 성장에 눈 먼 사람들은 멈추지 않는다. 사만타 슈웨블린은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벌레처럼 눈에 띄지않은 오염물이 우리 주변 곳곳에 퍼져있음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빛과 어둠. 켜짐과 꺼짐. 생과 사. 한순간인지도 모른다. 딸깍. 꺼져버린 빛이 불현듯 켜지길 기다렸다. 어둠 속에 머무르긴 싫으니까. 이미 빛을 잃은 생이, 다시 빛날 수 있을까. 무작정 주저앉아 기다릴 순 없다.
일으켜 세웠다. 아이가 걸을 수 없다며 다시 앉았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서 투정 부리는 거라고 여겼다. 아이는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아기가 되었다고 놀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5살 아이를 업고 동네병원에 갔다. 고관절에 염증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소염진통제를 처방받았다. 되도록 걷지 말고, 뛰지도 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좋다고 했다. 아이를 다시 업었다. ‘보고 있는 거야? 애 낳고 한 달도 안 된 산모가 보이긴 해?’ 병원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실내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뒤돌아봤다. 모든 전구가 동시에 꺼졌다. ‘아이가 아프다니, 궁금하긴 했나 봐. 집을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 우리가 걱정되긴 한가 봐.’ 얼마 걷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울컥 치밀어오는 감정을 잠재우려 아이를 벤치에 내려놓고 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영원(永遠)으로 출장 중인, 제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눈동자. 나는 별일 없다는 듯이, 네가 무거워서라고 했다. 아이가 세상사의 어둠을 알기엔 너무 이르다. 찬란하기만 한 유년의 빛 속에 아이를 좀 더 놓아두고 싶었다. 슬픔을 유예 시키면, 나중에 더 아플까, 덜 아플까. 나는 모른다. 해맑은 밝음 위로 드리우게 될 어두운 그늘을 피하고만 싶었다. 아이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힌 아이는 어린이집 안 간다며, 신나서 쫑알거렸다. 장마가 자취를 감춘 쨍한 여름날, 식은땀과 눈물로 내 눈앞은 여전히 흐렸다.
억지를 부리고 싶었다. 단순한 정전이 아니라고. 전류로 인한 남편의 죽음이, 전류 속에 녹아 온 세상에 흐르는 거라고. 내 마음이, 나를 옭아매고 흔들었다. 원망과 미안함과 서러움, 혹은 분노, 불안, 좌절이 공존했다. 느껴본 적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그 후로는 전등의 깜빡임과 전기 오작동이, 남편이 내게 보내는 신호라 믿었다. 사망신고서를 접수하러 가는 길에서도 그를 만났다. 교차로의 모든 신호가 빛을 잃고 꺼져있었다. ‘당신이지?’ 빛을 잃은 무언가를 보면, 자꾸만 그를 씌웠다. 어쩌면 내 삶 속으로 그를 다시 끌어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집안에 들어서면, 모든 사물이 온통 그로 넘쳤다. 같이 밥을 먹던 식탁에도, TV보며 뒹굴던 소파에도, 같이 잠들던 침대에도. 그는 보이지 않는데, 왠지 그가 보였다. 논리도 상실했다.
이사를 했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밤만큼이나 내 삶도 어두웠다. 갑자기 방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유난히 선명한 빛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현관 전등이 환했다. 누군가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켜지는 센서 전등이다. 서늘했다. 어떤 존재가 잠시 공간에 머물렀음을, 빛으로 알려주는 듯했다. 현관 쪽으로 가서 슬며시 중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어떤 개연성 없이 느닷없이 켜진 센서등. 도둑이었나. 문 열리는 소리도 없었는데, 그럼 누구지? 그다. 그 사람일 수밖에 없다. 센서등은 종종 이유 없이 켜졌고, 그때마다 나는 남편이 떠올랐다.
영화 「생일」을 봤다.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으로, 슬픔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일상의 표정을 잃었다. 현관 센서 등이 갑자기 켜지는 걸 보고, 아이가 온 것이라 생각하며, 허공에 말을 걸었다. 아이가 죽지 않았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표정이 밝았다. 아직 곁에 있다는 안도감과 반가움이었으리라. 영화 속 여자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
늦은 밤이나 새벽/아무런 기척도 없는데/현관 센서등이 반짝 켜지곤 했지요?//
놀라지 마세요/어머니 저예요//
이제 저는 보이지 않게 가고/보이지 않게/차려 놓으신 밥을 먹고/보이지 않게/어머니를 안아요//
다시 놓지 않으려/당신을 꼬옥 안아요/그때, 센서등이/반짝 켜지는 거예요//
-영화 「생일」에 나온 시 「엄마, 나야」 중에서
왜 고작 ‘전등’에 기대는 걸까. 사람들은 죽음을 마주하기 전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입에 올리는 것도 꺼린다. 삶과 죽음이 한 세트로 묶여있어도, 항상 삶만 보이고, 죽음은 삶 뒤쪽에 가려져 있다. 그래서 죽음은 낯설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수시로 생소한 감정들이 솟아올랐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표정을 지웠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갑작스러운 이별은 마지막 인사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떠나간 이도, 떠나보낸 이도 못다 한 말이 마음에 남았다. 상대를 잃어버린 말들이 전등과 마주쳤는지도 모른다. 전등은 남겨진 마음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아니었을까.
사별 후, 한동안 정체된 시간에 갇혀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없는 삶을, 다시 살아내기 위해 버틴 시간이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 소중했던 사람이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사라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게 마음이 편하다. 애도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흘러간다. 나는 서서히 그를 놓아주고, 내 표정을 되찾아야 했다. 남은 자에게는, 아직도 살아가야 할 시간이 남았으니까.
아직도 가끔 전등에 반응하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온전히 그를 전등에 씌우진 않는다. 그래도, 살다가 기척도 없이 남편 생각이 번쩍하고 켜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잠시 ‘그’라는 전등을 켜두면 되겠지. 어찌 보면, 살면서 마음속에 전등 하나 가지고 사는 것도 괜찮은 삶이지 않은가. 다시 내 삶에도 빛이 보인다.
매주 수요일마다 아이는 바이올린 수업을 간다. 아이 혼자보내기엔 애매한 거리라 동행한다. 아이가 수업받는 동안 나는 책을 읽었다. 어제 완독했다. 인간실격 요조는 이해 안 될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는 인물이다. 누구나 어느정도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니까.....난 어떤 인간일까 생각하게 된다. 불안도 고민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겠지만 좀 더 일찍 자유로워지길 바랄뿐이다. 자신보다 소중한 건 없다. 주변보단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이 먼저다. 요조가 다음생엔 좀 더 자기 자신으로 살면 좋겠다.
수필을 쓰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길 권한다. 수필을 대하는 자세를 다시 잡아 주는 책이다. 2013년 가을에 시작된 수필미학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것은 신재기 선생님의 수필을 향한 열정 때문이 아닐까. -------------------------------------------- p34 인생은 강물을 떠내려가는 작은 나뭇가지처럼 한자리에 머물 수 없다. 우리 삶은 변화와 도전과 선택의 연속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주체는 결정을 피할 수 없다.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것은 소신에서 우러나는 용기이다. 자기 삶에 대한 주인으로서 자신을 소신있게 지키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용기가 아니겠는가.
p122 학문이란 가치와 대학이라는 제도는 문학의 신에 대한 숭배를 보장해 주었다. 예술, 심미성, 무용의 유용성, 언어의 신비스러운 비밀 등의 추상적 관념은 경전이 되어 문학이란 천국을 약속했다. 이 신전에서 소위 문학을 위한 문학에만 매달렸다. 문학을 너무 몰랐다. 지금도 문학을 잘 모른다. 다른 것은 그때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문학을 신으로 숭배했고, 지금은 내가 문학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문학을 애써 알려 하지 않는다. 더 좋은 삶을 위해 문학과 함께 갈 따름이다.
p138 시보다 더 긴 길이는 경험의 구체적 형상화를 지향한 탓이고, 소설보다 훨씬 짧은 것은 일상의 단편을 담아내는 그릇임을 자처했기 때문일 겁니다. 수필계 안팎에서 줄기차게 비난받아온 '신변잡기'가 수필의 원래 모습입니다. 신변잡기는 수필이 폐기해야 할 항목이 아니라 다듬어 가야 할 자산입니다. 신변잡기가 왜 문제되고 가치가 떨어집니까. 그것을 표현하고 구성하는 방법의 미숙성이 걸림돌이지 신변잡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수필을 일상의 신변잡기로 인정하는 데서 수필 사랑이 시작된다고 봅니다.(중략) 힘을 주지 않고 무던하게 말하는 것이 수필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코로나로 아이들은 등교하지 않았다. 학교는 가지 않아도 교육은 멈출 수 없다. 온라인 수업을 위해 집집마다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기기가 필요했다. 우리집에는 7년 넘은 내 노트북과 남동생이 속도가 느려 안 쓴다고 준 노트북이 있었다. 성능이 좋지 않아도 아이들이 수업하기엔 괜찮았다. 내 노트북을 아이에게 주고 나니, 글쓰기는 점점 멀어져갔고, 스마트폰으로 짧게 기록하는 수준에 그쳤다.
아이들은 몇 달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코로나는 온라인 학습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아이들의 학습은 동영상 몇 개를 보고, 책에 적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대면이 아니라도 선생님과의 소통이 필요했다. 교육부에선 실시간 화상채팅으로 수업을 늘린다고 했다. 노트북 캠이 잘 작동되지 않아 노트북 1대를 더 구입했다. 이제 내 노트북이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잠시뿐이었다. 아이가 노트북 키보드를 깨끗이 닦는다더니, 키보드 위에서 물티슈 물을 짜서 닦고 있었다. 키보드 틈으로 물이 흘러들어갔다. 놀라서 물을 닦아내고 전원을 껐지만 자판 몇개가 먹통이었다.
서비스센터에 전화하니, 키보드를 교체하려면 12만원이 든단다. 수리를 포기해야겠다고 하니, 센터 기사분이 블루스트 키보드를 알아보라고 조언해줬다. 바로 조회했다. 여러 종류 중에 디자인과 실용성을 고민하다 블루투스도 되고, usb연결도 되는 무선 키보드를 선택했다. 배송오자마자 연결하려고 켰는데, 키보드가 블루스트로 잡히질 않았다. 바로 교환신청해서 다음날 다시 새 상품을 받았다. 비대면 시대에 택배는 정말 총알이다. 그 빠름의 이면에 고생하는 택배기사들을 생각하면 고맙고 미안하다.
새로 온 키보드는 바로 블루투스로 인식되어 노트북과 스마트폰에 연결했다. 하나의 키보드로 두개의기기를 쓸 수 있다는점이 마음에 든다. 이 글도 스마트폰과 연결된 키보드로 입력하고 있다. 오래된 노트북이 고장나도 걱정없다. 이제 글을 쓰고 싶을 때면 아무때나 쓸 수 있다. 화면이 작아서 무리하면 안 되겠지만, 오래만에 자판 위에서 느껴보는 자유시간이 참 좋다.
삶은 그리 둥글둥글하진 않다. 살다보면 갑자기 버거운 일이 튀어나와, 일상의 모양을 울퉁불퉁하게 만든다. 작가는 삶에 계속 부딪힌다. 그래도 피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툇마루에서 본 세상을 보듯 둥글게 다듬어 가며 살아간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삶에 대해 연금술적인 태도를 지녔다.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삶의 형태를 진솔한 글로 녹여내는 능력자다. 작가의 시선이 닿는 곳은 어느새 온기로 채워지고 사람냄새가 느껴진다. 의자 하나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치지 않고, 그들의 삶을 같이 느껴보려 노력한다. 자신의 실존적 삶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에 빠져 머무르진 않는다. 끊임없이 삶의 페달을 밟아가며 일상의 모든 부분을 문학적 토대로 이어나가는 사람이다.
책을 읽고 나니, 작가가 나에게도 의자 하나를 슬쩍 내밀어주는 느낌이다. 삶이 까칠해도, 우리 둥글게 살아보자고 말이다.
강화길 ㅡ 가원. 작가가 의도한 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야기보다 주인공 연정의 입장에서 바라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과 자신을 향한 그들의 애정방식을 생각한다.
서이제 ㅡ0%를 향하여 독립영화에서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 미래가 없다고 해도 열정을 막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그냥 쏟아부어야지...어쩌겠어.
임솔아 ㅡ 희고 둥근 부분 여러 죽음의 이야기가 섞인다. 작가가 독자를 혼돈에 빠뜨리려는 장치는 성공한 듯하다. 친구 인숙의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모. 고속버스 사고로 자신 밑에 깔려 죽어간 누군가의 눈동자를 잊지못해 자신을 생채기내는 민채. 민채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도와주려 했지만, 민채의 죽음으로 되려 상처를 입은 진영. 진영의 미주신경성 실신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맹점처럼 나타난다. 여러 죽음 또한 서로 연결성 없는 죽음처럼 보이나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18세기 기사와 20세기 벵상과 나. 같은 공간속에서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성과 쾌락, 느림과 빠름, 명성과 과시욕을 향한 열망. 타인의 시선과 카메라 앞에서의 이중성.
느림이란 제목 안에 담기엔 소설에 담긴 내용이 많다. 한 번 읽고는 이해 못한 부분이 곳곳에 있어서 이야기의 연결성을 못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176페이지의 짧다면 짧은 소설이지만 구성 특이해서 이야기를 쭉 이어가는 것이 힘들다. 소설 뒷부분에 '나'와 벵상과의 만남, '나'와 기사가 만나는 부분은 미스테리 같다.
고민만 하다가 몇 년이 지났다. 인터넷신문도 있는데 굳이 종이신문을 봐야할까. 스스로에게 묻고 주변에도 물어봐도 확실한 답은 없었다. 여러 포털사이트를 수시로 기웃거리며, 대충 훑은 뉴스들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기엔 부족했다. 물론 내가 정치나 경제에 관심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그저 삶을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정도의 정보면 충분하다. 그래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보수와 진보 두쪽의 의견을 다 들어보려면 종이신문도 두 곳을 신청해야하지만.. 내가 다 읽어낼 자신이 없었다. 끌리는 곳 한 곳을 신청했다. 어제 처음 신문을 받았다. 오랜만에 신문지 냄새를 맡으니, 어릴적 아버지가 신문을 보시던 모습도 떠올랐다. 나도 어느새 아빠처럼 신문을 보는 지긋한 중년이 되었다니. 중년의 나이가 되어보니, 난 아직도 세상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 많다. 아이들은 내가 신문보는 것이 신기한듯 바라본다. 아마 엄마는 세상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거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예전 나처럼. 신문에서 내가 무얼 얼마나 얻을지는 알 수 없다. 열심히 읽는만큼 세상의 눈은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을까. 다만, 읽지 않고 쌓아만 둘까봐 벌써부터 좀 걱정된다.